
신오쿠보역 주변거리
나리타 국제공항1-1 Furugome, Narita, Chiba 282-0004 일본
신주쿠3 Chome-38-1 Shinjuku, Shinjuku City, Tokyo 160-0022 일본
신 오쿠보1 Chome Hyakunincho, Shinjuku City, Tokyo 169-0073 일본
신오쿠보역은 전날 내린 역이다. 여기서 일본에 먼저 와 있던 지인과 랑데뷰했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나리타 익스프레스(N‘EX)를 타고 신주쿠역에서 야마노테선으로 환승해 한 정거장만 오면 되는 곳이다. 부근에 있는 코리아타운은 올드커머 중심의 오사카 이쿠노(츠루하시) 코리아타운에 비해 뉴커머 중심으로 형성된 동일본 최대 규모다.
1951년 신격호 회장이 신오쿠보역 근처에서 롯데제과 공장을 설립한 것이 코리아타운 성립 계기였다. 일본 각지에 있던 한인들이 일거리를 얻으려고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1987년 일본의 국영철도가 민영화되면서 오쿠보 지역의 슬럼가를 동일본 JR 주식회사가 매입하였는데, 이 때 보상금을 받은 한인 주민들중 일부가 주점을 개업하거나, 하숙업, 음식점 등을 해나가면서 점차 코리아타운의 모습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신오쿠보역 주변거리1990년대 말이 되면서 어느 정도 성공의 대열에 들어선 한인들이 기존의 재일동포들이 하던 야키니쿠점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메뉴를 갖춘 음식점이나 주점 및 한국 식료품점을 개업하기 시작했다. 2002 월드컵 개최와 한류 붐으로 이 지역을 찾는 일본인들이 급증하게 되자 더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패션과 음악 등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을 취급하는 점포로 계속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신오쿠보역은 2001년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내렸다가 희생된 고대생 이수현군 관련 보도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역구내 매점에서의 주류판매 금지, 열차비상정지버튼 등 대대적인 대비책이 마련되었고 한국에서도 거의 모든 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가 의무적으로 설치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오쿠보역 주변 가게
우동 국물로 지난 밤의 속을 달래고, 신오쿠보역 주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둘러봤다. 한국보다 아래 지방이라 6월말 기후가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식당의 메뉴 사진에도 ‘매운 맛’이 강조되고, 차가운 라멘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신오쿠보 주변이 워낙 한국 가게가 많고 한국인들이 많이 살아서 식당의 메뉴도 이를 반영한 것 같기도 했다. 최근에는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인들의 가게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신오쿠보역 주변의 동네 신사
하염없이 걷다가 일본 신사(神社: Shinto shrine)가 보여 들어갔다. 동네 신사라 규모가 그리 커진 않았는데, 구색은 웬만큼 갖추고 있었다. 신사는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토(神道)의 신을 모시는 종교시설이다. 2010년대 기준으로 일본 내의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신사가 약 8만 8천 곳에 이른다고 한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신사까지 포함하면 20만~30만 군데까지 추정할 수 있을 정도다. 일본 내 편의점이 5~6만 개 수준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월등히 많은 숫자다.
신사는 대도시 도심의 민가가 밀집한 곳에도 있지만, 보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주로 있다. 일본 여행길에 도심의 신사를 많이 봤는데, 문이 없다시피한 개방적 구조에 24시간 무료 개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듯했다. 밤에 지나가다 보면 약간 으스스하기도 하지만, 낮에는 바로 옆에 놀이기구가 있는 경우도 많아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여서 놀고 있어서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신오쿠보역 주변의 동네 신사
신토는 모든 생명과 자연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만신사상의 일종이다. 개인의 악행이나 선행도 해당 개인이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니라 신이나 악귀가 깃들어서 저지르는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후에는 정화하는 의식을 거쳐 신이 거하는 사당에 안치되어 모든 과거에 대해 용서받고, 그 자리에서 지난날 만들었던 모든 인과에서 벗어난 순수한 혼으로 묻혀있게 된다고 본다.
일본이 이러한 신토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미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신사를 세워 승리한 권력자로서 죽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라고 했던 것이다. 이후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 신사를 폭파시켜버렸다가 메이지 유신 주역들이 다시 복구하는 파란만장한 역사가 전개되기도 했다. 반면, 이렇게 히데요시 신사를 파괴해버린 도쿠가와는 자기의 신사인 세라다 동조궁에 잘 모셔져 왔다. 신토에 대한 민중의 전통인,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혼령을 진정시키는 기능에다가 권력자들이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영원히 드높이고자 하는 욕망을 덧붙이는 시도를 하게됨으로써 신토 본연의 모습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1869년 쇼콘샤라는 명칭으로 창건되어 1879년 개명된 야스쿠니 신사에 이르면 변질의 정도가 점입가경이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건립 당시부터 일본 전통과도 맞지 않았다. 일본의 관습에 따르면 망자의 제사는 망자의 자손 주도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246만여 명을 신격화해 망자의 자손이 아닌, 남들이 모시고 제사 지낸다는 것은 정당한 제사권을 지닌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고, 천황을 우러르라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장소로 재건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에 큰 공로를 세운 신페이와 사이고 다카모리 조차 사가의 난과 서남전쟁에서 천황에게 적대하였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원한을 품은 영혼을 구제하고 위로한다는 의미에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군인의 영혼을 높이 받들어 그 공을 기억하고 명예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로 목적이 질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특정 개인을 죵교적으로 숭배하는 것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국주의 자체를 숭배하는 곳이 되었고, 거기에 유력 정치인들이 적극 참배한다는 점이다. 또한, 자민당 정치인과 일본 최대 우익 결사단체인 일본회의, 신사본청, 일본 후생노동성을 비롯한 관료집단 등이 비공식적으로 연계하여 야스쿠니 신사의 업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신오쿠보역 인근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네 신사를 둘러보다가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다. 신토가 원한을 품은 영혼을 위로함으로써 세상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그 전통적 의미를 잘 유지하기를 바란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여지는 ‘군국주의의 무기화’ 우려가 현실화될 때는 모두가 불행해지니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