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재철 전 주콩고민주공화국 대사가 2023년 5월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한 한 행사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사진=코이카]

조재철 전 콩고대사가 펴낸 인문 논픽션 '챔피언들' 표지.
“심지어 싸우는 사람들마저도 서로 간에 공유하는 것이 있습니다. 싸우는 상대를 통해 자기가 배우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상대가 거울일 수 있다는 것이죠.”
30여 년간 외교 현장을 누빈 조재철 전 주콩고민주공화국 대사.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다뤄온 외교관이 서로를 쓰러뜨리기 위해 링에 오른 복서들의 삶에서 발견한 것은 인간의 이해와 공존이었다.
조 전 대사는 지난 22일 세계 헤비급 복싱의 황금기를 이끈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의 삶을 다룬 ‘챔피언들: 링 위의 승부, 그 너머의 인간’(책과나무)을 출간했다.
이 책은 세 선수의 역사적인 대결을 따라가면서도 승패의 기록보다 그 이면에 놓인 인간의 고독과 상처, 용기와 우정에 주목한다.
27일 재외동포신문과 전화 인터뷰에서 조 전 대사는 책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 “복싱에서는 펀치가 눈에 보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말로 주고받는 아픔과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며 “눈에 보이는 복싱의 펀치를 통해 인간이 서로에게 주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고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복싱이 단순히 상대를 쓰러뜨리는 스포츠가 아니라고 봤다. 링 위에서 치열하게 맞서는 두 선수는 서로를 이겨야 하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상대의 두려움과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링 위에 선 고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싸우는 상대가 결코 자기하고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조 전 대사는 특히 경기가 끝난 뒤 두 선수가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에 주목했다. 그에게 이 장면은 단순한 스포츠맨십을 넘어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경기가 끝난 뒤 두 선수가 끌어안는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대를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타인으로 바라보지 않는 데서 진정한 연대가 시작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더라도 인간이라는 공통의 조건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외교관으로 살아온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조 전 대사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행정대학원을 다녔다. 1993년 제26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부에 입부한 뒤 주헝가리대사관 1등서기관, 주아일랜드대사관·주스웨덴대사관 참사관, 주오사카총영사관 부총영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주짐바브웨대사와 주콩고민주공화국대사로 활동했으며, 울산광역시 국제관계대사도 지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넘나들며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를 경험한 외교관이다.
그는 복싱에서 발견한 공존의 의미가 외교와 어떻게 연결되느냐는 질문에 “외교도 그런 거죠”라고 답했다. “심지어 싸우는 사람들마저도 서로 간에 공유하는 것이 있다”며 “상대를 통해 배우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라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고,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설명하면서 2010년 발표한 장편소설 ‘다리’를 언급했다.
“‘다리’를 쓴 것도 한국 문화가 전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국악을 소재로 한 ‘다리’에는 한국 문화가 서로 다른 국가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국악과 복싱은 전혀 다른 분야지만 두 작품을 관통하는 조 전 대사의 관심은 인간의 관계에 있다. ‘다리’에서는 한국 문화가 세계를 잇는 역할에 주목했다면, ‘챔피언들’에서는 극한의 경쟁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들여다봤다.
세계 헤비급 복싱의 황금기를 이끈 세 복서. 왼쪽부터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조재철 전 대사는 신간 '챔피언들'에서 이들의 치열한 경쟁과 링 밖의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연대, 공존의 의미를 조명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공용]
그가 이번 책의 주인공으로 선택한 세 선수는 20세기 세계 복싱사를 대표하는 라이벌이다.
프레이저는 1971년 알리에게 프로 무대 첫 패배를 안겼다. 포먼은 1973년 프레이저를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이듬해 알리는 포먼을 물리치고 다시 정상에 섰다.
세 사람은 서로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큼 치열하게 맞섰다. 누구도 영원한 승자로 남을 수 없었던 경쟁이었다.
책은 1971년 알리와 프레이저의 ‘세기의 대결’, 1974년 알리와 포먼의 ‘정글의 혈투’, 1975년 알리와 프레이저의 ‘마닐라의 전율’ 등 역사적인 경기를 주요 무대로 삼는다.
그러나 조 전 대사의 관심은 경기 결과에 머물지 않는다. 세 선수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고, 정상에 오른 뒤 무엇을 얻고 잃었으며, 패배와 은퇴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를 함께 추적했다.
알리는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기량으로 시대의 상징이 됐지만 인종차별과 정치적 갈등, 육체적 쇠퇴에 맞서야 했다. 프레이저는 가난과 신체적 한계를 딛고 세계 정상에 올랐으나 알리와의 경쟁 속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포먼은 압도적인 힘으로 챔피언에 올랐다가 패배와 방황을 경험했다. 이후 다시 링으로 돌아와 45세에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의 삶은 승리와 패배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질문을 던진다.
조 전 대사는 세 선수의 삶을 조사하고 집필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엄청나게 공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관중과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한 링 밖의 인간관계였다.
“카메라가 잡지 못하는 링 밖에서 선수들끼리 얼마나 많은 우정을 나누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싸우는 것만 기억하니까요.”
조 전 대사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선수들이 링 밖에서는 인간적인 교류를 이어갔다는 사실에서 경쟁을 넘어선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책은 이러한 시선을 바탕으로 복싱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도 함께 다룬다.
알리의 삶에는 미국의 인종차별과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이 자리한다. 세계적인 복싱 영웅이었던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과정에서 논쟁과 시련을 겪었다.
1974년 당시 자이르에서 열린 알리와 포먼의 대결도 책에서 비중 있게 다룬다. ‘정글의 혈투’로 알려진 이 경기가 열린 자이르는 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이다. 조 전 대사가 훗날 대사로 근무한 국가이기도 하다.
책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과 넬슨 만델라의 삶도 등장한다. 젊은 시절 복싱을 수련했던 만델라가 장기간 수감 생활을 견디고 자유를 되찾은 과정은 인간의 인내와 존엄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
한국 복싱사의 한 장면도 담았다. 1974년 홍수환 선수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세계 챔피언에 오른 경기를 당시의 인종차별 정책과 함께 조명했다.
이처럼 ‘챔피언들’은 복싱의 승부를 그 시대의 역사와 사회적 환경 속에서 바라본다. 선수 개인의 영광과 좌절을 넘어 인종차별과 정치적 갈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문제를 함께 다룬다.
책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주제는 승부를 멈추는 순간이다.
복싱은 끝까지 싸우고 버티는 것을 요구하는 스포츠다. 그러나 때로는 물러설 때를 아는 판단이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1975년 알리와 프레이저가 맞붙은 마닐라의 대결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기다. 두 선수는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승부를 펼쳤다.
책은 이 경기를 통해 승리의 영광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선수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에도 주목한다.
조 전 대사는 세 선수의 은퇴와 복귀, 말년의 삶을 함께 다루며 인간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포먼의 복귀는 패배 이후에도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알리와 프레이저의 삶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남긴 상처와 육체적 한계도 드러난다.
그가 세 선수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승리의 순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조 전 대사가 인터뷰에서 강조한 ‘보이지 않는 상처’라는 표현과도 연결된다.
복싱의 펀치는 눈에 보이지만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과 행동이 남기는 상처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소홀하게 여기기 쉽다고 지적했다.
책에서도 알리가 프레이저에게 가한 언어적 모욕을 다룬다. 세계적인 영웅으로 평가받는 선수라도 상대의 존엄을 존중하는 문제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조 전 대사가 복싱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인간의 존엄은 상대를 이기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상대 역시 자신과 같은 고독과 두려움, 고통을 경험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재외동포사회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인터뷰에서 해외 한인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묻자 조 전 대사는 책에서 강조한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언급하며 동포사회도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조 전 대사는 2010년 장편소설 ‘다리’를 발표했고, 2016년에는 ‘사랑해요 엄마’에 필자로 참여했다. 2012년 근정포장, 2025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이번 책을 쓰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고 말한 뒤 “계속 공부하는 것이죠”라고 답했다.
조재철 전 주콩고 대사의 현직 시절 활동 모습. 2023년 8월 콩고민주공화국 수도 킨샤사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코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