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재관 천진시조선족년의회 회장이 9월27일 천진시 한중여자축구경기에
참가한 선수단과 임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뒤풀이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어둑어둑 해질 무렵 집으로 가는 길에 빌딩 사이 지는 노을 가슴을 짜-안하게 하네. 광화문 사거리서 봉천동까지 전철 두 번 갈아타고 지친 하루 눈은 감고 귀는 반 뜨고 졸면서 집에 간다. 아버지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男子의 인생. <나훈아의 남자의 인생 가사 일부>
9월27일 중국 천진시 남개구 링아오 체육장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3회 한중우호체육대회의 백미는 여자축구경기였다. 천진의 한국을 대표하는 서봉전자 팀(K시스터즈)과 조선족을 대표하는 津朝789팀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 경기였다. 양측 팀 모두 지난해 결성됐다. 이목을 끌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다가 만들어진 여자축구경기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고의 인기종목이 됐다.
이날 전후반 40분에 걸친 경기에서 津朝789가 서봉전자를 4대1로 물리쳤다. 지난해와 똑 같은 스코어를 기록했다고 한다. 津朝789팀에는 거의 여자 프로급 선수가 2명이 포진돼 있어 서봉전자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봉전자가 선제골을 터트리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후반전으로 이어지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결국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津朝789팀의 연령은 30대 초반인 반면, 서봉전자 팀은 40대 후반이었다.
이날 여자축구는 승자와 패자가 아닌 모두가 승자였다. 승패에 연연하기보다 한국인과 조선족과의 연대와 화합의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를 마치고 웨스틴 호텔에서 양측 축구 선수단 일행과 임원 등 80여명이 특별하게 뒤풀이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날 津朝789팀 감독은 서봉전자팀이 지난해 비해 실력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며 패자를 포용하는 여유를 보였다.
심재관 천진시조선족련의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분들 모두가 저를 비롯해 조선족의 조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을 것 같다”며 “저의 할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이라고 운을 뗐다. 심재관 회장은 이번 체육대회를 한국의 신은식 천진한국인(상) 회장과 함께 총괄 지휘를 했다. 도안면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현재는 증평군으로 편입됐다.
심 회장의 할아버지는 만주로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기대로 1940년대 고향을 떠났다. 언젠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이주를 결심했던 것. 당시 조선은 일제의 수탈로 인해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암울한 시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조선족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되고 대한민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자유롭게 왕래하던 고향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됐다.
“할아버지는 늘 고향을 이야기하셨어요. 마을 인근에 시냇물이 흐르고...세월이 흘러 제가 조부모가 돌아가신 뒤 고향을 찾아갔는데, 정말로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대로였어요.”
심 회장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만주에 눌러 앉으면서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이 과정에서 심 회장도 만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족의 역사는 불과 70년 정도라는 그의 설명이다.
그는 조선족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만주에 살면서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가능하면 결혼은 조선인(같은 민족)과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살아왔다”며 “이런 일련의 삶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우리 조선족은 갖은 고난을 딛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었다”고 강조하다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심재관 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신은식 회장(왼쪽에서 네번째)이 여자축구경기 대회에 참가한 선수단과 뒤풀이 행사에서 건배를 외치고 있는 모습.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심 회장의 짤막한 인사말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 순간, 가수 나훈아의 ‘남자의 인생’이라는 노래 가사가 오버랩 됐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 집으로 가는 길에 빌딩 사이 지는 노을 가슴을 짜-안하게 하네.”
그러자 신은식 천진한국인(상) 회장이 무대로 뛰어나가 심 회장을 부둥켜 안으며 조선족으로 살아온 지난한 삶을 위로하자 참석자들은 박수와 환호로 심 회장을 격려했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심 회장은 “조선족에게 흐르는 피는 한국인과 똑같은 피를 가졌고 감정 또한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 뒤, “조선족이 한국경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고, 한국 역시 조선족 사회에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다”고 밝혔다.
이날의 건배사는 거의 "우리는 하나다","한민족은 하나다"라는 핏줄과 동족의 의미가 담긴 메시지로 가을밤을 채웠다.
“혼자 있으면 좋은 생각을 하고, 둘이 모이면 말을 좋게 하고, 셋이 모이면 일을 좋게 하라는 말을 좋아한다. 오늘 눈치 보지 않고 우리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A씨)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밥을 먹고 싶었는데 오늘 같은 날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천진대학교 학생)
2시간 가량 진행된 뒤풀이는 이렇게 진한 여운을 남긴채 내년을 기약하면서 이날 행사는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