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업계가 글로벌 진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수시장이 정체되며 소비여력은 줄어드는 반면, 한류 콘텐츠에 대한 해외 소비자의 관심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와 이커머스가 국경을 허물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도 중요한 배경이다. 이제 한국 패션산업의 해외 진출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과 성장의 핵심전략이 되었고, 최근에는 구체적인 성과도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파리 사마리텐 백화점에서 열린 ‘타임 파리’ 팝업스토어.
대기업, 글로벌 진출 전략 다변화
국내 패션대기업들은 네임드 브랜드 중심의 홀세일 및 직진출, 법인·사무소 설립, 제휴·파트너십 활용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안정적으로 해외 무대를 넓히고 있다. 한섬은 지난달 말부터 2달간 프랑스 파리 사마리텐 백화점에 ‘타임 파리’ 팝업스토어를 열고, 내년 1월에는 갤러리 라파예트에 ‘시스템옴므’ 정식매장을 개장한다. 현재 영국의 주요 디파트먼트 스토어 입점, 글로벌 유통망 확보를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며, 지난 7일 태국에서 진행한 시스템·시스템옴므 패션쇼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시장 확장도 본격화한다는 구상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더현대 글로벌을 앞세워 오는 10월 대만 타이베이 신광미츠코시 백화점에서 11개 K브랜드 팝업을 연다. 국내 백화점이 해외 백화점에서 K브랜드 팝업을 직접 운영한 첫 사례로, 내년에는 타이중과 타이난 등 대만 다른 도시로 확장할 계획이다. 삼성물산은 최근 필리핀 수옌 그룹과 손잡고 에잇세컨즈 글로벌 1호 매장을 현지에 열었으며, 준지는 지난해부터 중국과 유럽 시장에서 플래그십 매장을 확대하고 있다.
코오롱FnC는 2017년 안타그룹과 합작한 코오롱스포츠차이나가 지난해 매출 7000억 원을 넘겼고 2026년 매출 1조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골프웨어 ‘지포어’는 일본 도쿄 긴자 식스와 중국 심천 믹스시티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었고, 젊은 층에 인기인 ‘왁(WAAC)’ 역시 중국 현지 진출을 공식화했다.
이밖에 LF는 헤지스·닥스 등의 글로벌 유통 채널을 확보해 영국, 홍콩 등에서 매출을 키우고 있으며, 휠라홀딩스는 미국·유럽에서 수익성 회복을 위해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리밸런싱 중이고, F&F의 MLB는 아시아 전역에서 1500개 이상의 매장을 확보하며 중국과 동남아에서 압도적 브랜드 파워를 과시한다.
시부야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개최 예정인 ‘무신사 도쿄 팝업스토어 2025’
K플랫폼, 해외 소비자와의 주요 접점
해외 소비자가 트렌디한 K패션 브랜드들을 처음 만나는 주요 창구는 플랫폼이다. 무신사는 오는 10월 도쿄 시부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팝업스토어를 개최해 80여 개 K패션·K뷰티 브랜드의 일본 진출을 지원한다. 최근에는 중국 안타와 합작법인을 세워 Z세대를 겨냥한 한국 스트리트웨어 매장을 2030년까지 100개 열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무신사의 뷰티 브랜드 오드타입은 최근 말레이시아 헬스·뷰티 체인 가디언즈에 입점해 두 매장에서 먼저 판매를 시작했고 내년 상반기까지 100개 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W컨셉의 올해 상반기 글로벌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0% 증가했다. 같은 기간 월간 활성 사용자수(MAU)와 누적 회원 수도 각각 약 27%, 12% 늘었다. 특히 뷰티 매출은 전년 대비 125% 증가, 가방 부문은 약 35% 증가한 것으로 나타하며 성장을 견인했다. 이 같은 호실적에 힘입어 W컨셉은 최근 글로벌몰을 전면 개편하고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선다고 밝혔다. 한류 열풍으로 K패션, K뷰티 수요가 급증하자 성장 잠재력이 큰 일본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고 입지를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K패션 공격수, 애슬레저·디자이너브랜드
디자이너 및 신진 브랜드들의 해외진출 역시 본격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마르디메크르디,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마뗑킴의 매출은 전년대비 각각 58%, 75%, 65% 증가했는데 해외실적증가가 성장세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힙입어 마르디메크르디는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베이징, 대만 타이페이, 홍콩, 방콕 등 아시아 여러 주요 거점에 플래그십 및 매장을 확대 중이며,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일본과 중화권, 태국 내 유통사들과 5년간 약 580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체결한 후 최근 상하이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 10월 홍콩에 첫 글로벌 매장을 연 마텡킴은 올해 상반기 일본 시부야점을 시작으로 하반기 홍콩, 대만 등에도 매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을 공략하며 런칭 10년 안에 해외 매출 비중을 50% 이상까지 끌어올린 앤더슨벨은 올해 파리를 시작으로 뉴욕, 도쿄에서 연달아 쇼룸을 선보였고 자라, 아식스, 클락스 오리지널스 등과의 협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더에러는 지난 7월 일본 오모테산도에 3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며 전 세계 60여 개국 판매망을 운영하고 있다.
상반기 국내 애슬레저 브랜드들의 호실적도 성공적인 해외진출에서 기인한다. 일본, 싱가포르, 호주 매장에서 월 35억 원 이상의 해외 매출을 기록하며 지난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안다르는 최근 프리미엄 애슬레저 브랜드 ‘스트레치유어스토리’ 런칭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북미시장 공략에 나선다.
젝시믹스의 2025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 대비 80% 이상 늘어났고, 일본 매출이 51%, 중국이 33%, 몽골은 90% 이상 성장했다. 일본에서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올해 시부야에 매장을 추가 오픈했고, 중국은 지난해 창춘에 첫 정식 매장을 연 이후 50개 출점을 목표로 현재 28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젝시믹스의 중국 10호 매장 전경.
글로벌 방방곡곡, K패션 수출시대
국가별로 보면, 한국 패션에 대한 젊은 소비자층의 관심이 높은 동남아시아에서는 해외 진출 초기 혹은 확장 단계의 브랜드들이 ‘온라인·팝업·편집숍’ 중심으로 시장을 탐색 중이다. 가격대가 크게 높지 않은 브랜드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일본, 대만, 홍콩 등의 중소 아시아 국가들은 문화적 거리감이 비교적 낮고 물류·유통망 확보가 용이해 초기 진출 사례가 많고, 안정적인 성과를 내는 한국 브랜드들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 시장은 기회의 크기와 동시에 리스크도 큰 시장이다. F&F·코오롱스포츠차이나 등 국내 매출을 압도하는 성장 사례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지만, 규제 환경, 브랜드 이미지 유지, 경쟁 심화 등의 요인으로 신중한 현지화 전략이 필수다.
초기 마케팅 및 유통 투자비용 부담이 큰 미국 및 유럽 시장은 디자이너·하이엔드 브랜드 중심으로 진출 중이다. 미국 관세, EU의 ESG 정책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은 것도 부담요소다. 중동·남미는 아직 초기 시장으로 잠재성은 크지만 유통·물류 인프라 확보가 어렵고 브랜드 인지도도 낮다.
K패션, 한류의 다음 주인공 될까
내수부진과 저성장에 빠진 한국의 패션기업들에게 해외 확장은 이제 공통된 생존 전략이다. 동시에 안정적인 유통 파트너십 확보, 브랜드 및 상품의 현지화, 마케팅·브랜딩 투자, 품질 및 기능성 확보, 그리고 환율·무역·규제 리스크 관리 등이 지속 성장을 위한 핵심 과제로 남아있다. ‘K’가 붙으면 대세가 되는 시대, K패션의 글로벌 성공 여부는 얼마나 현지 소비자, 문화, 유통 환경에 맞는 전략을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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