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8월호 보그 매거진에 게재된 게스 여름 컬렉션 광고가 거센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의 중심에는 ‘완전히 AI로 생성된 모델’이 있었다. 소비자들은 “실제 모델을 배제한 부정직한 미적 재현”이라며 반발했고, SNS 상에서는 보그 구독 취소 선언까지 이어졌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브랜드 광고 논란을 넘어, 최근 경기 침체와 기술 발전의 후과로 패션업계 전반에서 포용성과 다양성이 뒷걸음질치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AI가 패션업계 다양성에 양면적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최근 보그에 게재된 AI 모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세라핀 발로라
15년간 달성한 패션업계 다양성 담론
패션업계의 다양성 논의는 2010년대 본격화됐다. 2013년 흑인 슈퍼모델 베단 하디슨(Bethann Hardison)이 백인 모델 일색인 주요 패션위크 런웨이를 비판하며 문제를 제기했고, 2010년대 후반에는 미란다 오바마의 영향력으로 미국 브랜드들이 다인종 모델을 적극 기용하며 변화를 이끌었다.
2020년대 초반까지는 플러스사이즈 모델의 보그 커버 등장, 장애인 전용 어패럴 라인의 확산, 연령 다양성 강조 등 업계 전반에 진보적 변화가 이뤄졌다. ‘새비지x펜티(SavagexFenty)’, 크리스찬 시리아노(Christian Siriano), 크로맷(Chromat) 같은 브랜드들이 다양한 체형·인종·성정체성을 가진 모델들을 앞세워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고, 자라, H&M 등 주요 브랜드에서 성 중립 라인을 출시하기도 했다.
다양성 후퇴를 이끄는 주요 원인들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와 기술의 부작용 속에 패션업계의 다양성 흐름은 약해지는 추세다.
우선 경기 불황 속에서 많은 브랜드들이 수익성 중심의 전략으로 회귀하면서, 모델 다변화, 맞춤 제작, 인식 개선 캠페인 등 다양성과 포용성을 위한 투자 항목이 축소되었다.
오젬픽, 위고비 등 체중 감량 치료제가 크게 유행하면서 미의 기준이 다시 ‘마른 몸’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단일 사이즈를 내세운 브랜드 ‘브랜디멜빌’이 Z세대 소비자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SS25 시즌 런웨이에서는 플러스사이즈 모델 비율이 전체의 0.8%에 그치는 등 체형 다양성 측면에서 뚜렷한 후퇴가 나타났다.
여기에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부서의 해체, 상징적 캠페인에 대한 소비자 피로, 그리고 기술 도입 과정에서의 무비판적 수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다양성 담론은 위기를 맞고 있다.
AI가 패션업계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
최첨단 AI 기술은 패션업계의 다양성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미치고 있다. AI는 디지털 피팅, 자동 패턴 설계, 3D 가상 모델링 등에서 다양한 체형과 필요를 반영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장애인 어패럴 설계나 유니섹스 의류 테스트 등에서는 포용성을 확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대부분의 AI 모델은 백인·서구 중심의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학습되어 다양성 표현이 왜곡되거나 배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게다가 AI 광고는 실제 모델, 스타일리스트, 촬영 스태프 등 창작자들의 일자리를 대체할 위험이 있으며, 소비자에게는 비현실적이고 균질화된 미적 기준만을 제시할 우려가 크다.
최근 보그 사태에서 보여주듯 현재 AI는 패션업계의 포용력을 확대하기보다 다양성을 축소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양성과 포용력을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국내 브랜드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진=영앤생
한국패션계 다양성은 독립 브랜드가 주도
국내 패션업계는 다양성이나 포용성 같은 진보적 화두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였으나, 최근 젊은 세대 중심으로 페미니즘, 젠더 뉴트럴, 바디 포지티브 등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하는 브랜드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표적 사례로 ‘영앤생(YOUNG N SANG)’은 세대와 성별에 얽매이지 않는 패션 미학을 실험하는 지속가능·업사이클링 기반 브랜드로 최근 LVMH 프라이즈 세미파이널에 오르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다른 브랜드 ‘얼킨(UL:KIN)’은 예술과 사회참여를 융합한 업사이클링 브랜드로, 청각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모델로 기용하고 버려진 캔버스를 재활용해 옷을 만든다. 이밖에 23년 LVMH 프라이즈 세미파이널에 진출했던 디자이너 준태킴 역시 젠더리스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처럼 아직 주류 브랜드 중심의 전면적 변화는 미약하지만, 국내에서도 독립 디자이너 브랜드를 중심으로 다양성과 표현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시도들이 지속되고 있다.
다양성과 포용성 강화를 위한 미래 전략
패션업계는 다양성 확대를 위한 여러 캠페인, 브랜드 모델 변화, 디자인 혁신을 통해 전환기를 맞이해 왔다. 하지만 2025년 기준으로는 여전히 표면적 접근과 한계가 존재하며, 특히 플러스사이즈와 다인종 디자이너·모델 등 소수자 대표성은 제한적인 실정이다.
그러나 소비자 특히 Z세대는 뚜렷하게 진정성 있는 다양성 정책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지 않는 브랜드는 결과적으로 신뢰도 저하, 시장 경쟁력 약화를 겪을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과 가치 기반 소비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포용적이고 혁신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패션 브랜드는 투명한 AI 정보 공개와 데이터 다양성 강화를 추진하고,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조직 및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체형, 피부색, 연령을 아우르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포용성을 브랜드 정체성에 통합하는 장기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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