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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24 조선족 비즈니스맨의 눈을 키워준 ‘월드옥타’ - - 엄광철 월드옥타 중국지역 회장 강연 - - ‘교육열’과 ‘디아스포라’의 힘을 가진 조선족 - - “한·중·일 동북아에서 존재감 드러낼 것”
  • 박병두 기자
  • 기사등록 2025-07-05 22: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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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광철 월드옥타 중국지역 담당 회장이 지난 6월20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월드옥타 유럽·유라시아경제인대회장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박철의 기자]


‘조선의 별’이라는 뜻의 선성(鮮星)홀딩스 그룹. 조선(朝鮮)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에게서는 연변 사투리가 물씬 풍기지만 늘 당당한 모습이다. 중국 길림성 훈춘 출신으로 연변대학 화공과를 졸업한 토종이다. 그는 30년 전 중국 대련으로 이주했다. 더 나은 삶이 최종 목표였다.

당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물류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입사 3년 만에 IMF라는 복병을 만나 그가 다니던 회사는 중국 연락사무소만 남긴채 한국으로 철수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맨손으로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연락사무소를  겁없이 인수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엄광철 월드옥타 중국지역 담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지난 6월20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월드옥타 유럽·유라시아경제인대회장 단상에 섰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 이날 그는 “20년 전 월드옥타와의 인연을 맺었다”며 "월드옥타 대련 지회장과 월드옥타 10통상, 8통상 위원장, 월드옥타 부이사장을 거쳐 현재 중국 지역 담당 회장을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현재 월드옥타 회원 가운데 20%가량이 조선족 회원들이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한인단체가 수천 개입니다. 그중에 유일하게 조선족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이끌어준 단체는 월드옥타입니다. 특히 초창기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조선족에게 금융과 자본, 비즈니스의 트렌드를 익힐 수 있도록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시장은 어디가 좋고, 주식은 나스닥 시장을 추천하고, 담보는 절대 서지 말라는 등등...”

월드옥타와 조선족의 인연은 27년전인 1998년,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한인경제인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병태 월드옥타 회장은 한중 수교 후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향후 한반도 통일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족 회원 유치는 매력적인 카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미국의 비자 발급과 중국 당국의 해외 방문 허용 여부가 관건이었다.

조 회장은 미국과 중국은 물론, 한국 정부를 움직였다. 그의 끈질긴 설득 끝에 중국으로부터 “만일의 사태가 나면 책임을 진다”는 각서를 쓰고 조선족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당시 전체 참가인원 500여명 가운데  조선족인 이광석, 남룡해씨 등 20여명이 참여하면서 월드옥타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우리 조선족은 월드옥타에서 가족처럼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조선족은 시집간 딸이라고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그래서 월드옥타와 조선족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엄광철 월드옥타 중국지역 담당 회장이 지난 5월 서울 마포에서 본지와 만나 자신의 사업 및 근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칭화대학경영대학원(EMBA)을 수료한 뒤 홍콩중문대학교에서 정식 이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중간중간에 인하대·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도 수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물류업이나 서비스업 등 한 우물만 파고 있는 게 ‘답’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업다각화를 고민하던 끝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한국기업들은 IMF때처럼 또다시 야반도주를 시작했다.

“당시 중국 친구들이 한국기업의 채권이나 주식을 싸게 매입해 M&A를 한 뒤 회사를 팔면 한국기업들도 좋아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어요. 그래서 당시 부채가 2.3억 달러인 오리엔탈정공을 M&A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엄 회장은 물류와 금융 투트랙으로 중국과 한국을 무대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날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소개한 뒤 조선족 이민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조선족의 이민은 초근목피를 탈피하기 위한 ‘생존’에서 시작됐다. 1900년대 초 일제강점기 때 중국 길림성·흑룡강·요녕성 등 동북 3성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을 조선족, 또는 중국 동포라고 부른다. 이미 100년의 역사를 넘긴 상태다. 그럼에도 조선족은 현지에 안주하지 않고 1990년대 초부터  중국의 대도시를 비롯, 한국과 일본으로 새로운 이주를 시작했다. 돈을 벌어 조금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향한 욕망에서 비롯됐다. 엄 회장이 연변에서 대련으로 이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조선족이 유난히 자존심과 민족애가 강한 것도 이런 이민의 고된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 '조선족=이민'이라는 정체성은 '강인함' 그 자체이며 이는 곧 월드옥타의 정체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밝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수많은 조선족의 민초들이 피와 땀을 바쳤습니다. 특히  20여명의 조선족 장군들이 건국에 참가하는 등 조선족의 위상은 대단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족은  새로운 이주를 통해  꿈을 키워왔고 이 과정에서  모국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강해지고 있으니 큰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조선족의 위상에 대해 향후 글로벌 시장, 특히 동북아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강한 교육열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들에게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키운다’라는 말씀을 듣고 살았다”며 “여기에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조선족 디아스포라(이주)가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국가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210만명 조선족 가운데 100만명이 해외에 나가 있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미래가 없다”며 “세계시장을 배우는데 소홀하지 말라고 조선족에게 당부한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현재 한국 80만, 일본 12만, 미국·유럽 등에서 8만명 가량 살고 있다. 북경, 상해, 천진 등 중국의 대도시에도 조선족이 40만명 가량 분포돼 있다. 도라지는 한곳에서 3년이 지나면 뿌리가 썩기 시작하기 때문에 3년에 한 번씩 옮겨 심어야 한다. 대신 기름진 땅 보다 척박한 땅을 선택해야 20년 넘게 산다. 그래서 “오래된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고 한다. 바로 이주의 힘이 이런 도라지와 같다고나 할까.

출처 : 재외동포신문(https://www.dongpo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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