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태 재외기자.
수평선 너머로 바람이 불어오는 크라이스트처치의 바닷가. 그 고요한 파도와 어선들 사이에서, 나는 1200년 전 한반도 남단 청해진에서 바다를 지배했던 장보고를 떠올린다. 그는 단순한 무역상이 아니었다.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하나로 잇고, 사람과 물자, 문화와 신념,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교류한 바다의 선구자였다.
그런 장보고의 정신은 이 남태평양의 섬나라, 뉴질랜드에도 오롯이 살아 있다. 뉴질랜드의 전설 속에는 쿠페(Kupe)라는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수세기 전, 별과 파도, 바람을 읽으며 미지의 바다를 항해해 아오테아로아(Aotearoa), 오늘의 뉴질랜드에 도착한 폴리네시아의 항해자였다. 쿠페는 단순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낸 리더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통해 불교와 신라문화를 퍼뜨리고, 해양법과 공동체의 평화를 이끌었듯, 쿠페의 항해는 마오리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들의 바다는 생존의 공간을 넘어, 문명을 옮기고 문화를 꽃피우는 삶의 무대였다.
19세기 초, 뉴질랜드 해안에는 유럽의 고래잡이배와 무역선이 드나들며 마오리족과 신뢰를 바탕으로 교류가 이어졌다. 목재, 플랙스, 돼지, 감자, 산업화의 물품까지 바닷길을 통해 오갔고, 해안은 하나의 교류 플랫폼이 되었다. 그 시기, 한국에서는 조선 말기의 개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두 땅이지만, 바다는 언제나 문명을 잇는 다리였다.
오늘날, 그 바닷길을 통해 뉴질랜드에 전해지는 또 다른 장보고의 정신이 있다. 바로 K-컬처라는 이름의 현대판 ‘해상 문화 네트워크’다. K-팝, K-드라마, 김치와 한복. 이 모든 것은 과거 장보고의 바다에서 시작된, 사람을 향한 교류의 정신이 현대적으로 이어진 결과다.
뉴질랜드 곳곳에서는 K-컬처 페스티벌에서 뉴질랜드 어린이와 한국 어린이가 함께 노래하고, 한국 전통무용과 마오리 하카춤이 무대 위에서 어우러진다.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 한국 전통공예를 체험하는 시민들, K-푸드와 K-뷰티로 일상을 바꾸는 현지인들이 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은 현대판 장보고들이 인터넷과 무대, 커뮤니티를 타고 세계를 항해하는 모습이다.
뉴질랜드의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 영토 중 하나다. 이곳의 마오리 전통, 해양 보존 정책, 지속 가능한 수산업은 바다를 존중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해상 질서와 공동체의 평화,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융합을 이끌었듯, 오늘날 뉴질랜드는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 장보고가 오늘을 살았다면, 그는 아마 뉴질랜드 어딘가에 청해진 2.0을 만들었을 것이다. 마오리 친구들과 협력하며, 한류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배를 띄우고, 젊은이들의 창의력과 기술력을 실은 플랫폼으로 태평양의 문화 네트워크를 설계했을지 모른다.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연결되었다. 오늘의 우리는 인터넷과 항공으로, 문화 콘텐츠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뉴질랜드의 바다 위에서,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K-컬처는 단지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장보고의 정신, 곧 ‘사람을 향한 교류의 항해’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모습이다. 뉴질랜드의 잔잔한 바다 위를 누비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배들. 그 속에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음악, 춤,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이 실려 있다.
출처 : 재외동포신문(https://www.dongpo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