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면세산업이 정체기인 가운데 K패션 소비는 면세점 밖 시내 상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AI생성이미지(ChatGPT)
글로벌 항공여객은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넘어섰지만 면세산업은 정체를 보이고 있다. 한국 역시 방한 외국인과 관광 소비가 사상 최고규모임에도 면세점 매출 증가와 객단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과 보따리상 중심의 대량구매 모델이 약화되고 개별관광객(FIT)과 Z세대가 소비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면세산업의 경쟁 공식도 현지성과 경험으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 여행 소비 늘었지만 면세 매출 제자리
올리버와이먼(Oliver Wyman)이 9월 30일 발표한 ‘글로벌 여행 소매 시장 동향(Global Travel Retail Pulse)’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5년까지 전 세계 여행 관련 지출은 31%, 항공여객은 7% 증가했지만 면세 매출은 오히려 0.2% 감소했다. 특히 2023~2025년 항공여객은 연평균 6.2% 성장한 반면 여행소매 매출 성장률은 2.7%에 그쳤다. 2019년의 여객 1인당 매출 수준이 유지됐다고 가정할 경우 현재 글로벌 시장에는 약 50억 달러의 매출 공백이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이번 조사는 한국을 포함한 산업 통계와 독일·프랑스·영국·미국·일본·사우디아라비아·중국·인도 소비자 3825명, 업계 고위 관계자 30여 명을 대상으로 했다.
지역별 격차는 더 크다. 아시아·태평양은 2019년 여객당 매출을 기준으로 추정한 수준보다 매출이 76억달러 부족해 글로벌 부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유럽은 기준치보다 31억달러, 중동은 6억달러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유럽은 공항 리테일 투자와 브렉시트 이후 영국-EU 노선의 면세판매 재개, 장거리 여행객 증가가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중동은 일시적인 지정학적 변수에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여객당 여행소매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아시아 시장 약화의 핵심에는 중국인 소비 구조 변화가 있다. 하이난 등 중국 내 면세 채널이 성장하면서 해외 면세점과의 가격 차이가 좁아졌고, 중국 정부의 따이궁(代購·보따리상) 규제도 과거의 대량구매 모델을 약화시켰다. 올리버와이먼 조사에서 중국 고소득 소비자의 명품 지출 가운데 해외 구매 비중은 2019년 55%에서 2026년 25%까지 낮아졌다. 향후 아시아·태평양 여행소매 성장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기여도 역시 과거 약 65%에서 약 40%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대신 인도인과 한국인 여행자가 각각 미래 성장의 최대 20%, 10%를 담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공항 활용법 바뀐 Z세대, 쇼핑보단 체험
면세산업에서 가장 큰 변수는 세대 교체다. 현재 세계 항공여행 지출에서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61%이며, 올리버와이먼은 2035년 이 비중이 81%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젊은 여행객은 이전 세대보다 여행을 자주 하지만 공항에서 쇼핑하는 대신 모바일 콘텐츠, 라운지, 식음시설 등에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한다.
다만 이를 Z세대의 ‘면세점 기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조사 대상 여행객의 89%가 공항 리테일에서 새로운 제품이나 브랜드를 발견하거나 검토한 경험이 있었고 Z세대는 이 비율이 96%에 달했다. 새로운 제품을 발견한 직후 바로 구매한다는 비중도 전체 여행객은 44%, Z세대는 49%로 베이비붐 세대의 35%보다 높았다. 젊은 소비자의 문제는 구매 의향 자체가 아니라 익숙한 글로벌 브랜드를 반복적으로 배치한 기존 면세점의 상품 구성이 충분한 발견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의미다.
가격 경쟁력 역시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매를 유도하기 어려워졌다. 올리버와이먼 조사에서 소비자가 면세점에 기대하는 가격은 일반 국내 소매가보다 평균 약 18% 낮았다. 동시에 검색엔진과 가격비교 플랫폼, 인공지능(AI) 도구가 실시간 가격 비교를 쉽게 만들면서 ‘공항이면 싸다’는 과거의 인식은 약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신진 브랜드, 공항 전용제품, 지역 특화상품, 자주 교체되는 컬렉션과 체험형 판매가 새로운 경쟁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품목별로도 차이가 나타난다. 아시아·태평양을 제외하면 향수·화장품은 최근 여행소매 시장의 주요 성장 품목으로 남아 있는 반면 주류는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올리버와이먼은 특히 한국인 여행객의 소비 성향을 뷰티와 패션 중심으로 평가했다. 이는 향후 공항 리테일에서 패션을 단순한 명품 매장 집적이 아니라 신규·로컬 브랜드를 발견하는 채널로 다시 설계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韓면세시장 급감, K패션 소비는 시내 상권으로 이동
한국 면세시장에서도 ‘여객 회복과 매출 회복의 괴리’가 뚜렷하다.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2025년 국내 면세점 매출은 기내판매를 제외하고 12조 5340억 원으로 전년보다 11.9% 감소했다. 코로나19 이전 최고였던 2019년 약 24조 9000억 원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방한 관광객은 빠르게 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26년 1~8월 방한 외국인은 1505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1.6% 증가했고, 관광 분야 카드 소비액도 14조 180억 원으로 48.5% 늘었다. 그러나 8월 국내 면세점 구매객이 11.7% 증가하는 동안 매출은 4.1% 증가하는 데 그쳤다. 특히 외국인 구매객은 39.1% 늘었지만 외국인 매출 증가율은 8.0%에 머물렀다. 외국인 1인당 구매액은 약 73만 6000원에서 57만 1000원으로 22.4% 하락했다.
외국인의 쇼핑 수요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소비 채널이 면세점에서 명동·성수·홍대 등 시내 상권으로 분산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무신사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올해 1~8월 무신사 스탠다드 매출 가운데 외국인 비중은 명동점 68%, 성수점 61%, 홍대점 53%에 달했다. 성수의 라이프스타일 편집매장 ‘이구홈’도 6~8월 외국인 매출 비중이 56%, 무신사 킥스 성수점은 70%로 집계됐다.
이는 방한객의 패션 소비가 공항 면세점에서 로컬 브랜드를 직접 체험하는 시내 상권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면세점의 경쟁 상대가 더 이상 다른 면세사업자에 그치지 않고 백화점, 편집숍, 사후면세 매장, 온라인 플랫폼까지 확대됐다는 의미다.
인천공항 여객은 최대…면세점은 외형보다 수익성
공항 이용객은 오히려 역대 최대 수준이다. 인천국제공항의 2025년 여객은 7407만 명으로 2019년을 넘어섰고, 2026년 상반기 국제선 이용객도 3839만 명에 달했다. 문제는 높은 여객 수가 면세 매출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업자들은 외형 확대보다 수익성 회복에 집중하고 있다.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은 높은 임대료 부담을 이유로 인천공항 일부 사업권을 반납했고, 이후 재입찰에서 공항공사가 제시한 최저 수용 단가는 기존 사업자의 여객 1인당 임대료보다 크게 낮아졌다.
구조조정 효과는 실적에서도 나타났다. 2026년 2분기 국내 면세 4사는 모두 영업흑자를 기록했다. 롯데면세점은 매출 9043억 원, 영업이익 319억 원을 기록했고, 호텔신라 면세부문은 매출이 9.1% 감소했지만 364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신세계면세점도 매출 감소 속 333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현대면세점은 62억 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최근 실적 개선은 시장 자체의 완전한 회복보다는 고비용 공항 사업과 저수익 매출을 줄인 효과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향후 한국 면세산업의 회복 여부는 관광객 수보다 여객당 매출과 구매전환율을 얼마나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 단체관광객과 따이궁 중심의 대량구매 모델이 약화된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매출 구조로의 복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신 Z세대와 개별관광객을 겨냥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글로벌 명품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K패션 신진 브랜드, 한국 한정 상품, 짧은 주기의 컬렉션, 체험형 공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공항을 단순 판매 채널이 아니라 해외 소비자가 한국 브랜드를 처음 접하는 ‘글로벌 쇼룸’으로 활용하는 전략이다.
결국 한국 면세산업의 과제는 여객 증가 자체가 아니라 방문객에게 다시 쇼핑할 이유를 만드는 데 있다. 가격 할인과 브랜드 집적 중심의 과거 모델에서 벗어나 ‘새로운 브랜드의 발견’과 ‘한국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느냐가 다음 성장 국면을 좌우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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