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2일 라오스 비엔티안 코라오그룹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세영 회장.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 자리한 코라오그룹 빌딩. 1층에 들어서자 약 100여 평 규모의 인도차이나뱅크 본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보라색’이다. 창구 직원들은 모두 보라색 제복을 입고 있다.
고객들이 앉는 의자와 은행 곳곳의 인테리어에도 보라색이 사용됐다. 보라색은 라오스에서 부와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색으로 통한다. 인도차이나뱅크가 설립 초기부터 부유층을 겨냥해 구축한 ‘고급은행’ 이미지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창구 위쪽 벽면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가 걸려 있는 가운데 유독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복층으로 구성된 2층에는 VIP 라운지가 자리하고 있다. 라오스 금융권 최초로 도입했다고 한다. 인도차이나뱅크의 VIP 고객이 되려면 30만 달러(한화 5억원) 이상을 예치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VIP 자격이 단순히 금융회사가 우수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도차이나뱅크 VIP가 일종의 ‘사회적 지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은행측 설명이다.
매년 연말 VIP고객초청 행사에는 약 2000명이 참석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일부 자산가들은 가족 모두가 VIP 행사에 초청받기 위해 부모와 자녀 명의로 각각 30만 달러씩 예치한다. 그래서 한 가족이 서너 개의 VIP 자격을 갖는 경우도 적지 않다.이 독특한 ‘부자은행’을 만든 사람은 한국인 기업가 오세영 코라오그룹 회장이다.
인도차이나뱅크 본점 영업장.
인도차이나뱅크는 2008년 라오스 중앙은행으로부터 은행업 허가를 받아 설립됐으며 2009년 2월 비엔티안에서 공식 영업을 시작, 올해로 17년째 영업을 하고 있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비롯, 주요 도시에 14개 지점을 두고 있는 인도차이나뱅크는 내년 상반기까지 7~8개 지점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수신 3조원의 신화…14개 지점에서 영업
라오스 민간은행 1위를 달리고 있는 인도차이나뱅크. 라오스 금융시장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민간은행이 현지 국책은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융회사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수신 규모다. 현재 수신은 약 3조원 규모이며 여신은 수신의 약 75% 수준이다.
라오스 연간 예산이 5조원 안팎을 감안하면 인도차이나뱅크의 포지션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인도차이나뱅크 관계자는 “우리 은행은 자동차 할부금융회사나 캐피탈회사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수신을 받아 여신을 공급하는 제1금융권 은행으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다수 시중은행들은 현지 금융회사를 인수·합병하거나 일정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해 왔다. 반면 인도차이나뱅크는 한국인 기업가가 라오스 현지에서 직접 은행을 설립하고 키워냈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달랐다.
은행 관계자는 “한국인이 해외에서 직접 은행을 설립해 현지에서 제1금융으로 성장시킨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내 대형 은행들은 왜 라오스에서 좀처럼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했을까.
"혹시 인도차이나뱅크의 영향력 때문은 아닌가"라는 질의에 오 회장은 "여러 이유중의 하나는 되겠지만, 그보다는 “라오스는 시장이 작은 데다 생각보다 은행 라이선스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차이나뱅크 본점 VIP룸.
그는 이어 “세계적인 은행들과 기본적인 영업은 물론 금리 경쟁까지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한국 금융회사들의 해외진출 전략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국내 은행들이 해외에 진출해 한국인이나 한국기업만 따라다니면서 영업해서는 결코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대형 건설회사가 해외에 진출하면 따라가 PF(프로젝트 파이낸싱)를 하는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국내 은행 해외진출...한국인 상대 영업만으로는 한계
결국 해외 금융사업의 성패는 ‘현지화’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한국 기업 몇 곳을 고객으로 확보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현지 기업과 현지인을 고객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그 나라의 금융회사로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차이나뱅크가 라오스 부유층을 겨냥해 VIP 라운지를 만들고 보라색을 은행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지인의 문화와 소비심리를 금융서비스에 접목해 ‘고급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선점했다. 리스크 관리도 인도차이나뱅크 성장의 한 축이다.
오 회장은 “코로나 이전에는 수신고가 2조원이 채 되지 않았는데 코로나 이후 3조원을 넘어 깜짝 놀랐다”며 “우리 은행의 자동차 할부금융은 대부분 2000만~3000만원 수준이어서 부실 위험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대출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한다. 일정 규모 이하의 대출은 실무진이 판단하지만 100억원 이상의 여신은 이사회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내부통제와 리스크 관리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했다. 코라오그룹 자체의 재무구조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코라오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현대기아차 쇼륨 전경.
오 회장은 "코라오그룹 계열사는 모두 78개 가운데 한국 증권시장에 상장된 LVMC 및 이와 관련된 5~6개 회사를 제외한 71개사의 부채가 거의 제로 수준"이라며 "현지화가 답"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금융모델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라오스 부유층의 문화와 자존심을 금융상품과 서비스에 접목한 오 회장. 보라색으로 상징되는 고급은행 전략, VIP 마케팅, 자동차 사업을 통해 구축한 현지 네트워크, 엄격한 리스크 관리가 결합되면서 오늘의 인도차이나뱅크를 만들었다. 한국 금융회사들이 베트남·인도네시아·캄보디아 등 동남아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차이나뱅크의 성장 과정은 또 다른 해외진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