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박병두 기자
  • 기사등록 2024-01-24 10:49:55
기사수정
심향사는 현재 나주 금성고등학교 내에 자리 잡고 있다. <나주시 제공>

40만 거란군을 피해 개경을 나올 때 현종은 400㎞가 넘는 나주를 최종 피난처로 정하지는 않았다.


거란군이 평양성을 제쳐 둔 채 수도 개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에 황급히 궁궐에서 빠져나와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피난길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경기도 연천에서 지역 토호와 무인(武人)들이 현종을 잡아 가두려 했고, 경기도 양주에서는 향리(鄕吏)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충남 천안과 공주에 이르렀을 때, 호위하던 장병 5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도망가 버렸다. 10일 흐른 후에도 승전 소식이 들리지 않자 현종 일행은 목적지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전북 여산까지 내려오자 남아 있던 장졸들마저 불만을 내뱉었다. 가는 곳마다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야전에서 숙식해야 했던 무관들이 하나둘 도망치려 했다.


간신히 그들을 달랜 현종은 전라도의 가장 큰 도시인 전주에 도착했다. 아마도 현종은 전주를 최종 목적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곧바로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영겸(趙容謙)이 영접했다. 그런데 조영겸이 관복이 아닌 야복(野服)을 입고 나타났다. 보통 신하가 왕을 맞이할 때 무장을 해제하고 관복을 입어야 하는데, 조영겸이 칼을 차고 있었다.


그는 현종을 전주에 잡아두고서 위세를 부리려고 계획했다.


그 만큼 거란의 침입은 고려 민심을 소용돌이치게 했고, 후백제 지역이었던 전라도에 고려 왕실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날 밤 조영겸은 현종이 머무르고 있는 행궁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을 치고 현종을 겁박했다. 신하 지채문의 지략으로 간신히 전주를 빠져나온 현종은 1011년 1월13일 나주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험난한 피난길이었다.


가는 곳마다 협박을 당하고 안전마저 보장받지 못할 만큼 민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종이 나주를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으로 선택한 데는, 고려 왕실과 나주가 뿌리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890년 후백제 견훤이 광주에 입성하자 전남 동부지역은 모두 투항했지만, 나주, 신안, 무안 등 서남해 지역은 강력히 저항했다. 9년간의 전투 끝에 서남해 지역의 진출을 포기한 견훤은 전주로 올라가 국호를 백제로 정했다. 궁예의 명을 받아 서남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건은 나주에 머물면서 나주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장화황후 오씨는 훗날 고려 2대왕 혜종을 낳았다.


지금의 나주 객사 인근에 도착한 현종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심향사(尋香寺)에서 매일 부처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주 객사에서 심향사로 가는 길목을 현재 ‘사매기’(사마교에서 유래된 듯함)라고 불린다. 현종이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건넌 다리를 사마교(駟馬橋)라고 했다. 그래서 이 다리 근처를 지금도 ‘사매기’라고 지칭하고 있다.


현재 이곳 사매기에는 나주 곰탕집을 비롯해 박물관, 카페 등 먹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하다. 나주시에서 고려 현종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장화황후거리’의 이름을 붙여 관광 자원화하는 등 다양한 도시재생사업도 펼치고 있다.


1010년 1월16일, 개성에서 달려온 신하가 현종에게 ‘거란이 철군했다’라고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현종은 곧바로 개경으로 올라가지 않고 10일간 나주에서 머무르고 21일에서야 올라간다.


나주에 도착한 5일간은 심향사를 오가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면, 나머지 5일은 나주읍성 곳곳을 둘러보면서 이래저래 뜻하지 않게 휴가를 보낸 것이다.


1000년 전 고려 현종의 발자취를 따라서 역사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나주읍성을 찾아가면 된다.

나주 읍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려 현종의 발자취와 조선 500년의 전라도 역사를 들여다보기에 충분하다. <나주시 제공>

나주읍성은 서울처럼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읍성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려 현종부터 조선 500년의 이야기를 몸소 체험할 수 있다.


강인규 나주시장은 “몽골 침입 때 피난 온 고려 현종 거리를 비롯해 1000년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옛 모습으로 재현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 도시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도시재생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나주에서 환대를 잊지 않았다. 10일 동안 어느 지역보다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준 나주 백성의 충심을 높이 평가해 나주에서도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도록 했다.


이로써 나주는 고려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현종은 1018년 대대적인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8목(牧) 4도호부(都護府)를 두었는데, 이때 나주가 8목 중 하나가 됐다.


앞서 성종 대에 설치된 12목 중에 포함돼 있던 전주와 승주목은 이때 제외됐고, 나주목 만이 전라도에서 유일한 목이 됐다.


현종이 전주에 도착했을 때 반란을 꿈꿨던 조영겸은 목이 날아갔고, 전주는 8목에서 제외됐다.


왕족이었지만 사생아 출신이었던 현종은 온갖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절에 숨어 살다 왕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거란 3차 침입을 막아낸 강감찬, 양규 등과 함께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한 현종은 이후 고려의 전성기를 연 성군으로 평가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는 고려 왕조 제2의 개창자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new.kscn.co.kr/news/view.php?idx=1267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1,105. 월요편지 삶의 희로애락만큼 가을도 깊어갑니다.
  •  기사 이미지 ks06 다년간 지도경력 원장직강 (함수학4층, JYP영어2층)
  •  기사 이미지 1,104. 월요편지 가을도 삶도 아름답고 맛있게 익어갑니다.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