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여성 백파선 동상
오는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일본 사가현 아리타 지역에서는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대규모 문화 행사인 '아리타 도자기 축제'(有田陶器市)가 열린다.
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축제는 단순한 관광 이벤트를 넘어,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가 교차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금까지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한 여성의 이름이 있다. 바로 ‘백파선'(ひゃくばあせん)’이다.
물론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도공 이삼평(李参平)이다. 조선 중기의 도공인 그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불린다.
그러나 같은 시대, 그의 곁에는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이라는 비극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 조선 여성. 그는 수백 명의 도공을 가르치고, 아리타 도자기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삶은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본명조차 확실하지 않고, 문헌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후손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온화하고 오래 살았던 여성”, “도공들을 이끌었던 어머니”
그 이름이 바로 백파선이다. 기자는 최근 아리타와 ‘갤러리 백파선’ 등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백파선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잊혀진 전설이 아니라 과거의 아픔에서 미래의 교류로 이어지는 한일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했다.
아리타 도자기축제에서 열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전통미술공예학과 특별전 포스터
1592년, 일본의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복의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 전쟁, 즉 임진왜란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동시에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낳았다. 어찌보면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전쟁과 이주의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백파선 역시 그 격동의 역사 속 인물이다.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낯선 땅에서 생존해야 했다. 1616년, 이삼평이 아리타에서 백자 원료를 발견하면서 일본 도자기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백파선은 그 흐름 속에서 도공 공동체를 이끄는 중심 인물로 자리 잡는다.
1630년, 70세의 나이에 아리타로 이주한 그는 9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도공이 아니라 기술을 전한 교육자였고 공동체를 이끈 리더였으며 한일 문화를 잇는 연결자였다.
그는 수백 명의 도공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생산 체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를 “아리타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남성 중심으로 쓰였고,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동안 잊혀져 있었다.
노진주 진주도자기공방 대표
2016년, 아리타 도자기 발상 40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는 백파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결과 탄생한 공간이 바로 ‘갤러리 백파선’이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한일 도자기 문화의 뿌리를 기억하고 역사 속 여성의 역할을 되살리는 장소. 이런 뜻 깊은 장소에서 이번 아리타 도자기 축제 기간 동안 의미 있는 한일문화 교류 행사가 열린다.
일본큐슈한국인연합회 사가 지국장이자 진주갤러리 관장인 노진주 관장이 운영하는 ‘진주갤러리’와 ‘갤러리 백파선’ 두 공간에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의 교류 작품전 및 현장 판매전이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진과 학생 작가들이 함께 참여해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도자기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지난 3월 11일에는 일본큐슈한국인연합회(회장 심현수)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간의 문화교류 협약이 체결되며 양국 협력의 기반이 더욱 공고해졌다.
심현수회장은 “한일 도자문화의 지속적인 교류 증진을 위해 노진주 관장과 함께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일본 전통미를 잇는 문화적 가교 역할을 매년 수행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한 홍보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리타 현장에서 ‘진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노진주 진주도자기공방 대표는 이곳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며 아리타 도자기의 현재를 지켜보고 있다.
‘갤러리 백파선’이 만들어 질 때부터 참여해 10여년 동안 부관장을 맡아 봉사해 오다가 올해 3월부터 관장직을 맡았다.
“거의 20년 이상 아리타에서 일을 해왔습니다. 이 400년이라는 역사는 그냥 이뤄진 게 아닙니다.”
그는 아리타 도자기의 역사를 단순한 전통이 아닌, “지속적인 노력의 집합”이라고 표현했다.
“이 전통을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기 위해 장인들, 지역 주민, 사가현, 일본 정부까지 모두가 함께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도 이 역사와 가치를 함께 조명하고 서로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정영미 쇼케이대학교수, 노진주 진주도자기공방 대표, 심현수 재일본큐슈한국인연합회 회장,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전통미술공예학과 김석곤 학과장, 최성재 학장, 이정용 교수가 협약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