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 팡청(方城) 문화관구 안 중제거리.
최근 한중 관계는 연이은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상호 신뢰 회복과 실질적 협력의 확대를 모색하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정상 간 교류가 재개되고 협력의 필요성이 다시 강조되는 지금, ‘협력은 실제로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본지는 중국‘동북3성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을 찾았다.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이어지는 이곳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의 산업 거점이자 오랜 시간 인적·역사적 연결이 축적된 공간이다. 이번 기획은 정책이나 선언이 아닌‘현장’에 주목했다.
산업 구조의 변화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가는 기업들,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해온 한인 공동체, 그리고 한국과 중국을 잇는 조선족 네트워크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협력의 실제 모습을 현장 취재를 통해서 기록했다. 특히 기술, 사람, 지역이 결합된 협력의 방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성과와 한계가 나타나는지를 입체적으로 살펴봤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동북아 경제 협력의 현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고자 했다. 이번 기획은 주선양대한민국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진행됐다. 한중 우호 협력의 ‘살아있는 증거’로서의 동북3성, 지역 사회와 호흡하는‘K-기업가 정신’의 재발견, 미래지향적‘한중 경제협력의 이정표 제시’라는 공감대가 본지와 형성됐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알린다.
선양 현장 취재는 본지 대표인 박철의 기자와 부대표인 왕길환 기자, 베이징주재 이나연 재외기자가 취재팀을 꾸려 3월10~13일, 4월1~4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본지는 창간 23주년을 맞아 ‘동북3성 리포트:한중협력의 현장을 가다’라는 주제로 10회에 걸쳐 특집기사를 게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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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시의 쭉 뻗은 거리 모습. 한중 관계의 앞날을 내다보는 듯 하다.[왕길환 기자]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지금, 동북아 협력의 축도 다시 움직이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중국 동북3성이 있다.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한반도와 맞닿은 지리적 조건과 함께 러시아, 북한과 연결된 위치를 바탕으로 동북아 경제 협력의 전략 거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북3성 리포트:한중협력의 현장을 가다’기획취재를 위해 취재팀이 선양 공항에 도착한 3월10일. 선양 코리아타운인 시타(西塔)거리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구대완 선양총영사관 영사는 동북3성에 대해 개괄적인 소개를 해줬다.
그는“동북3성은 단순한 산업 지대가 아니다. 중공업 중심지에서 출발해 첨단 산업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제조 기반, 그리고 오랜 역사와 인적 네트워크가 결합된 복합 경제권”이라며 “과거와 현재, 산업과 사람이 동시에 얽혀 있는 구조가 이 지역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북3성의 산업적 위상은 중국 현대 산업사와 함께 높아졌는데, 안산의 철강, 선양의 기계 제조, 다칭의 석유 산업은 신중국 초기 산업화를 이끌었던 핵심 축이었다”고 덧붙였다.
동북3성은 한때 ‘중국의 맏아들’로 불리며 국가 경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도 했다.
선양시는 과거에 봄이면 엄청 추웠는데, 요즘은 한국과 날씨가 거의 비슷해졌다고 창밖을 내다보며 구 영사는 잠시 날씨 이야기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실제 추울거라는 예상을 깨고 밖의 온도는 창문을 열어도 바람이 오히려 상쾌할 정도였다. 다시 대화는 이어졌다. 개혁개방 이후 남부 연해 지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동북 지역은 상대적으로 성장 정체를 겪었으며 이에 중국 정부는 2000년대 초 ‘동북진흥 전략’을 추진하며 산업 구조 개편과 체질 개선에 나섰다고 한다.
중국 동북 3성 이미지.
최근 동북3성의 변화에 대해서는 공항에서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시타거리에서 만난 김인국 흑룡강신문사 특약기자가 설명을 보탰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신에너지 자동차, 첨단 소재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선양의 로봇 산업, 창춘의 자동차 클러스터는 중국 제조업 전환의 주요 거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북3성은 다시 산업 협력의 무대로 부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기에 이곳을 단순한 제조 기지로만 보는 시각은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김 기자는 “동북3성의 경쟁력은 생산 능력보다 산업 구조와 네트워크에 있다”며 “특히 한국과의 협력은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동북3성은 한국과 역사적으로도 깊이 연결돼 있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와 발해의 활동 무대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이 전개된 공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지금, 인적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선양시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서탑거리 모습. '한국커피'라는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띈다.[왕길환 기자]
중국 전역 약 170만 명의 조선족 동포 가운데 상당수가 동북3성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이해하는 경제 주체로, 기업 활동과 지역 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선양시 조선족연의회부회장이자 조선족 기업가인 이성국 선양경성진출구무역유한공사 대표는“한국 기업이 동북3성에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족 네트워크는 중요한 기반이 됐고, 제도와 관행을 설명하고 현지 파트너십을 연결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족 사회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경제 규모도 적지 않다. 주선양대한민국총영사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과 동북3성 간 교역 규모는 약 100억 달러 수준이다. SK, CJ, 포스코, 롯데, 농심 등 주요 기업을 비롯해 다수의 중견·중소기업이 제조와 물류, 식품, 서비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의 협력은 단순한 투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손창호 총영사관 경제영사는 설명한다. 손 영사는 본지가 수여하는 ‘제22회 발로 뛰는 총영사상’을 받았다. 중국 동북3성 전역을 직접 방문해 한국기업과 한인의 경제적 애로 해소를 위해 헌신한 점을 인정했다.
“많은 기업이 현지 인력을 채용하고 기술을 공유하며 산업 생태계 형성에 참여해 왔고, 공장이 들어선 지역에는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며 생산 현장에서는 기술이 축적됐습니다.”
손 영사는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은 장기적인 협력 관계이며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생산 이전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며 “이러한 경험은 동북3성 협력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선양 중제(中街)거리.
한인회와 동포 단체들의 역할도 눈에 띈다. 한인사회를 지원하는 동시에 한국과 현지를 연결하는 민간 협력 네트워크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경제 활동과 문화 교류, 사회공헌 활동이 결합되면서 협력의 기반도 확대일로라고 한다.
김정순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한중무역협력위원장은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동북3성에 구축된 이러한 네트워크의 의미는 점점 커지고 있다”며 “국가 간 협력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연결이 산업 협력의 안정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