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글로벌 섬유패션산업의 가장 큰 위협은 경기둔화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미국 관세·통상 정책의 불확실성이 공급망 전반을 압박하며 미국 의존도가 높을수록 구조적 위험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브랜드와 리테일러들은 발주 물량을 쪼개고, 납기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시키고, 중국 단일 구조에서 벗어나 동남아·남아시아로 생산지를 다변화하고 있다. 주요 섬유패션수출국 역시 고부가 제품 위주의 산업개편, 글로벌 무역협정 확대 및 각종 정부 지원을 통해 경쟁국과의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 관세정책에 타격을 받은 섬유패션수출국들이 시장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미국 관세가 드러낸 단일 시장 의존의 위험
필리핀은 대미 의존의 위험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국가다. 필리핀 외국바이어협회(FOBAP)에 따르면 필리핀 의류 수출에서 미국 비중은 80%를 넘는다. 이처럼 단일 시장 의존도가 높은 상태에서 2025년 7월 미국이 필리핀산 수출품에 19% 관세를 적용하면서 구조적 취약성은 현실적인 위기로 전환됐다. 선구매 물량을 늘어나며 지난해 의류 수출은 11% 성장했지만, 이는 미국 바이어들이 관세 부담을 일부 또는 전부 흡수해준 결과다. 차후 바이어의 비용 부담이 커질수록 협상력은 줄어들고, 그 압박은 결국 필리핀 공장의 마진과 고용으로 전가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필리핀이 이미 경쟁국 대비 비용 구조에서 불리하다는 점이다. 전력, 물류, 인건비 부담이 높아 필리핀산 의류는 베트남이나 인도, 방글라데시보다 10~15%가량 비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세가 붙는 순간 이 격차는 더 벌어진다. 그럼에도 필리핀은 당장 미국을 대체할 시장을 찾기 어렵다. 유럽이나 중동으로의 시장 다변화가 논의되고 있지만, 미국 시장이 차지하는 물량과 안정성을 단기간에 대체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결국 필리핀은 미국을 떠날 수 없지만, 미국 때문에 산업 전반이 흔들리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캄보디아 역시 미국 의존의 위험성을 경험 중이다. 의류와 신발이 경제와 고용의 핵심인 캄보디아는 대미 수출 비중이 전체의 3분의 1을 넘는다. 미국 관세가 한때 49%까지 거론·적용되면서, 이는 단순한 산업 이슈를 넘어 국가 경제 전망과 고용 안정성에까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후 관세 수준이 낮아지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이 경험은 미국 정책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산업과 거시경제를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스리랑카는 최근 수출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증가분의 상당 부분이 특정 시장에 집중돼 구조적 리스크는 여전한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지난해 12월 미국과 유럽, 영국의 수출은 전년동월대비 6.5%, 6.8%, 13% 증가했으나 다른 시장으로의 수출은 4.06% 감소했다.
미국 시장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글로벌 공급망
미국발 불확실성이라는 동일한 위협 앞에서 주요 섬유패션 수출 국가들은 다른 생존 전략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국내 공급망 강화와 FTA 활용에 주목한다. 베트남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2025년 섬유 및 의류 수출액은 460억 달러이며 올해는 500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생산 능력과 원단·부자재를 포함한 공급망 내재화, 그리고 다수의 자유무역협정을 결합해 관세와 정책 리스크를 흡수 가능한 변수로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베트남은 수출 규모 자체가 크고, 특정 바이어나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분산돼 있어, 가격과 납기, 원산지 요건을 통합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이 구조는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오히려 베트남을 더 매력적인 대체지로 만든다.
인도는 지난달 EU와 20년 만에 세계 GDP 25% 커버하는 최대 FTA 체결하며 수출 포트폴리오를 재배치하고 있다. 또한 미국 50% 고관세도 최근 18%로 인하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었다는 평가다. 내수 시장과 원자재 기반이 탄탄한 인도는 한 시장이 흔들려도 다른 시장으로 물량을 이동시킬 수 있는 정책적·구조적 여지를 갖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초대형 규모를 기반으로 EU 시장에서 2025년 1~9월 의류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3.17% 증가하는 등 성과를 보이고 있다. 다만 규모 경쟁형 구조는 단가와 마진이 얇고, 브랜드의 가격 압박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다. 시장이 안정적일 때는 규모가 강점이 되지만, 정책이나 수요가 흔들릴 때는 충격이 빠르게 전이될 수 있다.
규모·투자·FTA, 섬유패션산업 경쟁축이 변하고 있다
글로벌 섬유패션 수출국들이 직면한 미국 발 리스크는 관세율 그 자체보다 관세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여기에 각국의 비용 구조와 생산성 격차, 그리고 원산지 규정과 우회 수출에 대한 규제 강화 가능성이 겹치면서 단순한 생산지 이동만으로는 리스크를 관리하기 어려운 국면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 시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공급망 투자와 규모 확대, 통상 레버리지를 갖춘 국가만이 미국 발 불확실성 속에서도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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