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에는 미국 일방주의에 입각한 '턴베리'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화물선. [사진=언스플래쉬]
2026년에도 ‘다자주의’가 아닌, 미국 일방주의를 토대로 한 이른바 ‘턴베리 체제’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 WTO체제가 무력화되고, 글로벌 통상 질서가 미국 중심의 ‘외교력’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통상 정책이 경제 안보에 연계되며, 관세가 공급망 재편 수단으로 활용되는 ‘통상정책의 경제안보화’ ▲(미국의) 외교적 힘을 기반으로 한 ‘상호주의적 양자 합의’ 등이 특징이다. 또한 ▲양자 합의에 기반해 관세 등의 조치가 국가별로 차등 적용되는 ‘규범의 차등 적용’ ▲무역 분쟁에서 강대국(미국) 중심의 ‘외교적 협상력’이 중시되는 ‘법적 분쟁 해결의 무력화’ 그리고 ▲‘무역 장벽의 악순환’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GATT, WTO 등 전후 ‘다자주의’ 종언
KB금융연구소는 이런 성격의 ‘다자주의 기반 글로벌 통상 질서의 약화’를 전망하며, “그간 글로벌 통상 질서는 회원국 간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강조되는 다자주의(GATT와 WTO 체제)를 기초로 발전해 왔으나, 최근 선진국이 정부 주도 산업 정책을 추진하는 등 다자주의 통상 질서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서 ‘선진국’은 사실상 미국을 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국을 중심으로 자국 내에서 생산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다자주의가 추구하는 ‘비차별성’과 효율적인 ‘분업화’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등장하는 새로운 질서의 축이 ‘턴베리 체제’다. 이는 제임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턴베리 체제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인한 자국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다. 즉,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제조업 위축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향후 글로벌 통상 질서를 미국 중심의 ‘외교적 파워’ 중심으로 재편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국제무역 지형이 미국 중심의 '외교력'으로 결정될 전망이다. [사진=언스플래쉬]
단적으로 ‘턴베리 체제’는 양자 간 협정에서 ‘관세’와 ‘협상’을 적극 활용해,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통상 질서다. 이는 지난 7월 27일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열린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무역 합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턴베리 체제하에서는 통상 질서가 다자주의 대신, 미국 중심의 경제 안보와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양자주의 체제로 재편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역 장벽 확대 등의 구조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이는 ‘통상 정책의 경제 안보화’, 즉 통상 정책이 미국 중심의 경제 안보에 연계되며, 관세가 공급망 재편 수단으로 활용된다. 효율성을 중시한 WTO 체제와는 다르게, 통상 정책이 경제 안보(핵심 광물에 대한 공급망 협력 강화)에 연계된다. 관세가 전략적인 공급망 재편과 재정 확보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하에 상호관세, 품목별 관세, 대중국 고부가 반도체 수출 금지 등의 통상 정책을 경제 안보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관세수입(누적 합계)은 2025년 1월부터 10월까지 2054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1400억 달러나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관세의 무기화’는 미국·EU·중국처럼 경제 규모가 뒷받침될 때 시행할 수 있는 전략이다.
선적을 대기하고 있는 수출 화물선.
美 등 강대국 이익 확보, 전략적 연대 조율
역시 ‘외교력’을 바탕으로 한 상호주의적 양자 합의가 새로운 협상 수단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그간 WTO 체제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상호 개방을 목표로 한 다자적 규범 기반의 양자 간 협상이었다. 그러나 ‘턴베리 체제’의 양자 합의는 경제 안보를 목표로 한 외교적 힘을 기반으로 한 협상으로 변용될 수 있다.
‘턴베리 체제’ 구상은 WTO 체제에서 비롯된 불균형, 즉 중국의 개도국 지위 남용(개도국을 자처), 신흥국 보호무역 등을 양자 합의로 타파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 등 강대국의 이익을 확보하고, 전략적인 연대를 조율하는 방식이다.
이같은 방식의 양자 합의가 활성화될 경우 글로벌 통상 체계가 복잡해져 각국의 외교력과 협상력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자 합의에 기반해 관세 등의 조치가 국가별로 차등 적용될 전망이다. 즉, WTO 체제가 최혜국 대우(모든 국가에게 동일한 관세 적용)와 내국민 대우(자국산 제품과 동일한 세금·법률 적용) 원칙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턴베리 체제는 양자 합의에 기반해 관세 등의 조치가 국가별로 차등 적용될 수 있다.
미국은 실제로 2025년 4월 2일 이후 한국(상호관세율 15%), EU(15%), 일본(15%) 등 동맹국에 교역국 간의 양자 무역 협상 결과를 토대로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종전처럼 무역 분쟁이 발생할 경우 법적으로 해결하던 방식이 무력화된다. 대신에 역시 힘의 논리가 작용한 ‘외교적 협상력’이 중시됨으로써 미국 등 강대국이 유리해진다. 무역 분쟁이 발생할 경우, WTO 체제에서는 ‘법적 문제’로 다루어 ‘상소기구’(Appellate Body)의 객관적인 판단을 중시했다. 그러나 턴베리 체제에서는 ‘외교적 협상력’이 중시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질서로 재편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무역 분쟁 사건의 2심(최종심) 재판부였던 WTO 내 상소기구는 현재 무력화되었다. 미국이 트럼프 1기 당시였던 2017년부터 상소기구 위원에 대한 신규 임용을 거부하면서 2019년 12월 활동이 중단되었다. 미국은 앞서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상소기구 위원들의 일관되지 못한 법률 해석”을 비판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품어왔다. 그러면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WTO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USTR에 따르면 WTO 상소기구는 1995년부터 2019년까지 25년간 미국 정부의 ‘반덤핑 규제’ 등이 수시로 WTO의 규범에 반한 것으로 판단하며, 미국 정책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가 반기를 든 것이다. 대신 2020년부터는 EU 주도로 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MPIA)이 ‘WTO 상소기구’를 대신해 한시적으로 도입되었다. 다만, 이는 MPIA 가입국에 한정된 것이다. MPIA는 WTO 회원국에 한해 가입할 수 있는데, EU·캐나다·일본·호주·중국·칠레·멕시코 등이다. 총 53개국(WTO 회원국 중 32%)이 가입했으며 현재 한국은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이처럼 다자주의가 약화되면서 각국은 협상용 지렛대로 앞다퉈 무역 장벽을 강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 울산항 선적 현장. [사진=현대자동차]
美 일방주의에 대한 반작용도 예상
그러나 2026년엔 미국의 일방적인 통상 질서 재편 노력에 대한 반작용도 예상된다. 특히 관세 적법성 논란과 교역국의 대응 등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트럼프 행정부가 패소하면 그 대안으로 무역확장법(제232조)과 통상법(제301조) 등을 내세우며 관세 정책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전보다 정책 추진력은 약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다른 교역국들은 미 우선주의에 맞서 ▲다자주의 연대 강화 ▲맞대응 ▲미국과 협상 우선 기조 등으로 대처할 가능성도 크다.
이에 KB경영연구소 배재현 연구원은 “‘턴베리 체제’ 구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될지 아직 불분명하나, 새로운 통상 질서 속에서 한국은 맞춤형 통상 정책과 다층적인 안전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배 연구원이 말한 ‘다층적 안전판’은 ‘CPTPP’, 즉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약정’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다자주의는 단기간에 쇠퇴하기보다 기본 틀을 유지하되, 기능적으로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론 진입 장벽과 조건부 투자 등을 활용한 상호주의적 양자 협정이 점차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비해 WTO 신규 분쟁건수는 2020년 이후 급감, 분쟁 해결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통상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분쟁 해결 경로를 확보하는 것이 이로울 수 있다”며 “이 밖에 외교·안보 이슈가 불필요한 경제적 리스크를 확대할 수 있으므로, 소모적인 논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글로벌 통상 질서의 변화에 대응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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