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말 안동에서 개최된 월드옥타 대표자대회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신원칠 서봉전자 대표.
지난달 9월 25일 LG전자 톈진공장 내 서봉전자를 찾았다. 걸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계단 오른쪽에 서봉전자(瑞峰電子), 왼쪽에 푸라이디(福萊迪)라는 중국업체 간판이 보였다. 비슷한 규모의 이들 회사는 모두 PCB 어셈블리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업체와 경쟁을 해서 이겨야 한다. 한국업체라고 봐주지 않는다”라는 LG전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했다. 이른바 경영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메기 이론’이 떠올랐다. 정어리를 수조 안에 넣어두면 산소가 부족해 쉽게 죽어버린다. 그러나 수조 안에 메기를 한 마리 집어넣으면 정어리들이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치는 과정에서 산소가 공급돼 정어리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뜻이다.
신원칠 대표는 “늘 긴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퇴출당할 수 있다”며 “그러나 LG 때문에 망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강조했다.
38년간 LG전자와 함께 걸어온 서봉전자는 LG전자 1차 벤더업체로 협력사 가운데 현재 1위를 달리고 있다. 사무실 입구 정면에 ‘한가족의 마음(一家人的心)’, ‘도전정신(挑戰情神’, ‘고객감동(顧客感性滿足)으로 해석되는 사훈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공장안은 규모 면에서 방문객을 압도했다. 대략 1만6000㎡(5000평)정도의 공장 내부는 10개 라인에서 약 500여명의 직원들이 PCB 회로에 들어가는 각종 부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공장 한 켠에 자리한 대표 사무실은 7~8평 정도. 연간 취급액이 3000억원이 넘는 회사의 대표 사무실은 지나칠 정도로 소박하게 보였다.
LG와의 38년, 동행의 자부심
신 대표는 1987년 서봉전자에 입사, 제조 담당 과장으로 승진한 뒤 제조업의 열악한 현실을 직접 체험했다. 가장 큰 애로는 원청업체가 밥 먹듯이 하청 업체에 작업변경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업자들에게 잔업이나 야근을 부탁하러 다니는 등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종종 잔업을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모든 작업의 책임은 신 대표의 몫이었다. 이런 이유로 “언제가 내 사업을 하게 되면 우동 장사를 했으면 했지 제조업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터에 2002년 텐진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서봉전자 톈진 법인을 설립한 뒤 이듬해인 2003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한참 텐진 생활에 적응하던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본사가 부도나면서 그 불똥이 텐진으로 튀었다. 채권자들은 회생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매각을 종용했지만 기다리던 인수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7년간 톈진에서 세워 온 자존심도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야간도주를 하든지 인수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죠.”
그런 그가 서봉전자 텐진 법인 인수를 고민하기에 이른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으니 제조업을 통해 이를 갚으라는 뜻은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제조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바뀌고 있었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잔업 거부나 노조 문제가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채권자들에게 “2년간 할부로 갚겠다”는 끈질기게 설득, 서봉전자를 2009년 인수한다. 당시 그의 아내 조차 “망하면 길거리로 나 앉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거의 일주일 동안 시위를 하다시피 했다. 아내는 결국 2억 원짜리 통장을 내밀었다. 10년 넘게 봉급쟁이 생활을 하면서 근근이 모아 둔 돈이었다. 신원칠 대표는 그렇게 텐진에서 첫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2011년 9월경 LG전자 톈진 구매부장 5명이 예고 없이 회사를 찾아왔어요. 시설을 둘러보고 돌아갔는데, 다음날 전화가 와서 서봉전자가 1위 PCB업체로 선정됐는데 LG사내로 들어올건지 말건지 결론을 내라는 거였어요.”
서봉전자 내부 공장 전경
이때부터 LG전자와 협력업체라는 인연이 본격화된다. 그러나 회사는 인수했지만 운영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은행은 물론, 지인들을 쫒아다니며 ’읍소‘했다. 흑자로 전환되기까지 5년 동안 지독한 고생을 했다. 신 대표는 “LG전자의 도움은 그야말로 감동의 드라마를 쓰고도 남는다”는 말로 대신했다.
“제조업의 본질은 공정을 줄여 생산성과 효율성을 얼마만큼 올리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LG전자가 물량을 늘려주면서 납품 대금에 대한 결재를 탄력있게 해주면서 신뢰를 보내주었어요. LG전자의 이런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봉전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기업현장에서 결재 수단은 한국의 어음과 비슷한 ’청뚜‘를 사용한다. 중국의 대다수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에게 보통 1년짜리 ’청뚜‘로 결재를 해준다고 했다. 그러나 LG는 중국업체에게는 6개월짜리 ’청뚜‘로 결재해 준 반면, 한국 업체에게는 3개월 단위의 청뚜이를 지급해줬다. 서봉전자의 이런 신뢰는 청소기를 시작으로 전자레인지에 들어가는 PCB어셈블리, 에어컨 등으로 생산범위가 확대된다.
“LG전자의 문화는 협력업체가 열심히 노력하면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웬만한 귀책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고 기회를 주면서 숨을 쉬게는 해준다 이겁니다. 협력사를 동반자로 키워준 거예요”
서봉전자 톈진 공장에서는 PCB 부품 조립, 인쇄납 도포, 비전검사, 히트싱크 자동조립 등 모든 과정에 데이터 기반 ERP 시스템을 도입했다. 특히 자재관리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재고 수량을 표시하고, ‘안전재고 이하’로 떨어질 경우 경고등이 깜박인다.
“현장 직원 누구나 컴퓨터 없이 재고를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런 시스템 하나가 공정 차질을 줄이는 핵심입니다.”
그는 “제조업에서 품질은 기본이다”며 “어떻게 생산과 효율을 높이느냐가 승부”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서봉전자는 매년 예산의 10%를 R&D 및 자동화 설비 개선에 투입한다. 현재 이 회자의 자동률은 75%다. 대형 제품만 수작업을 통해 생산한다.
성과 위주와 차별화된 인센티브제 도입
그는 회사를 인수한 뒤 아침 7시30분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팀장 회의를 열어 공장 관리에서부터 생산과 효율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소통하는데 앞장섰다. 2년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철저하게 솔선수범하면서 ‘자율적인 현장 리더십’이 스며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서봉전자 조직문화는 성과 위주와 파격적인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게 된다.
“매달 전 직원이 평가를 받아요. 목표 생산성·품질·효율 달성률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죠. 라인별 조장이 15~25명의 팀원을 이끌고 있는데, 팀 전체가 목표 100%를 달성하면 1인당 300위안의 보너스를 받습니다. 달성률이 80%면 그만큼 삭감되는 구조입니다. 매달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약 24만 위안(한화 5000만 원)에 이릅니다.”
지난 8월 서봉전자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耿聽 씨(왼쪽 첫번째)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이런 구조는 ERP(전사적자원관리) 등 공정하고 체계적인 보상체계를 뒷받침하고 한다. 즉 조장은 팀원 내 등급을 나눠서 배분하고 일부는 조별 회식비나 게임 등 놀이를 하면서 직원끼리의 연대와 화합을 도모하는 촉매제가 됐다. 나머지는 전자레인지, 밥솥 등 전자제품을 구매해 실적이 우수한 조원에게 포상한다. 지금까지 30여 차례 이런 시스템이 진행됐다. 초창기에는 5만위안(1000만원)도 못 가져갔다는 신 대표의 설명이다.
“조장은 우수한 직원의 부모님께 고가의 전자제품을 보내기도 하는데, 해당 직원도 모릅니다. 그러면 고향의 부모님은 자녀가 다니는 회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겠지요. 바로 일터가 곧 가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죠. 모든 시스템은 경영진과 관계없이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날 신원칠 사장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유리창 너머로 세미나실이 보였다. 20~30대로 보이는 10여명의 직원들이 한국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수강생은 한 달에 대략 40~50여명. 이들은 틈나는 시간을 이용해 조별로 하루 1시간 30분 가량 한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이들은 신 대표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직원들이 부쩍 늘었다”며 “직원들의 성격도 매우 밝아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한국어 자격증 인센티브제에 대해 신 대표는 “제일 낮은 등급인 6급을 따면은 500위안, 5급은 1000위안, 4급은 1500위안까지 지급한다”며 “기본급이 2300위안 수준인데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이런 자격증을 따게 되면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지급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컴퓨터 자격증이나 각종 품질 및 생산 관리 자격증을 따도 마찬가지. 자격증 한 개 딸 때마다 500위안씩, 최대 2000위안까지 회사에서 지원한다. 만약 한국어 자격증과 컴퓨터 등 서너개의 자격증을 소유하면 매월 받는 급여와 비슷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파격적인 대우로 인해 회사의 관리직 이직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봉전자 직원들의 전체 평균나이는 30대 초반이다. 20대 초반의 생산직 사원의 봉급은 잔업을 포함, 80만원(한화)이다. 팀장급은 15년 가량의 경력자로 한화 250만원, 공장장이 대략 300만원 수준이다. 이날 서봉전자 공장 현장을 둘러봤다. 각 라인의 상단에 우수상을 받은 직원들의 간단한 프로필이 소개돼 있었다.
이달의 우수상을 받은 耿聽 씨(28세)는 “입사 2년 차인데 지난달(8월) 뜻 밖에 우수상을 받아 매우 기쁘다”며 “서봉전자의 보상시스템이 가장 매력적이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제3회 한중우호체육대회에 참가한 신원칠 대표(사진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제3회 한중우호체육대회에서 한국팀 대표로 출전한 서봉전자 여자축구팀 'Sisters '선수들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장면.
신 대표는 톈진 국제학교를 비롯해 각종 사회단체 행사는 물론 조선족 단체까지 일일이 챙기고 있다. 특히 매년 크리스마스때에는 연길 지역 학생들에게 유니폼을 비롯해 양말과 모자를 보내고, 조선족 여성 최대의 단체인 ‘애심’ 등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직원들은 물론, LG의 덕분 때문에 회사가 여유를 갖게 되면서 기부할 수 있을 정도의 회사가 됐다는 점에서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행복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근 서봉전자는 LG 협력으로 안정적 기반을 다진 뒤, 최근 독자 브랜드로 R&D를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인덕션 통돌이 밥솥’이다. “삼겹살도 구울 수 있고 김치찌개도 끓일 수 있습니다. 밥솥과 전기팬을 합친 신개념 생활가전이죠.”
현재 한국 판매가는 38만 원선이다. 홈쇼핑 등 현재 유통업체들이 30만원 정도로 가격을 낮춰달라고 해서 1~2인용 모델(25만 원대)도 개발해두었다. 오는 10월 27일 인천에서 개막되는 세계한인경제인대회 및 Korea Business EXPO Inchon에 전시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서봉전자는 헬스케어시장 진출을 위한 다양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 초 출시 예정인 이 제품은 현재 보안이다.
“중국만 해도 잘사는 인구가 4억 명이 넘어요. 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죠.”
그는 여전히 매일 공장을 돌며 설비를 점검하고, 직원들의 교육상황을 확인한다. “기계는 바꿔도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LG와 함께 배운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경영하는 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