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경하는 경희인 여러분.반갑습니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경희가 출범의 초석을 놓은 지 7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설립 이래 수많은 분이 정성껏 쌓아 올린 경희의 역사.
진행형인 그 역사와 함께 우리는 오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경희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하면서, 경희 설립의 서사가 주는 시대적 함의를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경희의 탄생
“새 세기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요망한다.
세계는 지금 창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구원을 기다리는 파선(破船).
묘안과 방안이 나오지 않는 한 침몰을 피할 수 없다.” (* 원문 일부 수정)
1951년, 전쟁의 시련 속에 미래를 헤쳐갈 대안을 모색한 『문화세계의 창조』 첫 문단입니다.
경희의 시작은 이렇듯 새로운 희망이 절실한 현실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보편 가치를 찾아 나섰습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이념과 인위의 장벽.
그것이 만들어 낸 대립과 갈등, 전쟁과 폭력.
그 너머 존재해야 할 인간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과업이 경희 탄생의 철학적 기초였습니다.
1953년, 전쟁을 피해 부산 동대신동에 건립된 판자 교사에서 1회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세계사적 혼돈의 시대를 맞아 졸업생들이 스스로 쌓아 올려야 할 생의 과업, ‘운명 창조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세계 내 존재인 인간.
그 세계의 열린 공간에 던져진 인간의 숙명.
미래를 향한 ‘사유와 판단, 의지적 실천’이 남다른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는 졸업식사가 있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경희의 서울 교정에선 초대 학장 취임식이 개최됐습니다.
취임사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우리의 꿈은 동서양 그 어느 기관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새 빛을 창조하는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합니다.’
열강의 국익 충돌 와중에 발생한 동족상잔의 비극.
1인당 국민 소득이 70불 남짓한 세계 최빈국.
막대한 채무를 안고 있던 경희의 현실.
그런 현실 속에서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명문의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남다른 도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무렵 공표된 대학 교가엔 이런 포부가 담겨있습니다.
‘온오한 학술연구 온갖 노력 바치고’
‘변전하는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여’
‘문화의 상아탑을 쌓으려는 젊은이’
‘인류 위해 일하고 평화 위해 싸우세’
나라와 인류의 비운과 함께 태어난 ‘학문과 평화’의 길.
질곡의 세계사를 헤쳐갈 인간의 ‘문화세계.’
그 길은 경희 서사의 시작이자, 오늘도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오늘의 현실, 미래의 현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역사의 전개는 경희가 소망했던 길을 순탄히 열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장과 팽창, 각축과 쟁취….
산업화 시대 이후 펼쳐진 그 일상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더 크게 다가섭니다.
그 너머 세계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일은 희귀한 일이 됐습니다.
더 나은 인간의 가치를 향한 지구적 성찰의 과업도 문명사의 파고를 넘어서기엔 역부족입니다.
현대 산업문명의 진전과 함께 상존해온 소외와 빈곤의 역사.
대립적 문화 속에 이어지는 전쟁과 폭력.
시대의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선 기후, 핵, 파괴적 과학기술의 진전.
‘진화 혹은 절멸.’
‘평화 혹은 붕괴.’
그런 학계 화두가 우리 일상의 바로 곁에 있지만, 문명사의 위기를 대처할 종합대책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 현실의 힘은 무엇인가.
무엇이 유례없는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맞아 포괄적 대안 마련을 늦추고 있는 것일까.
두 가지 사항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해 왔던 대로의 힘.’
‘틀과 배타적 이익 추구의 관성.’
그 힘과 관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해졌습니다.
‘현대 산업사회의 성장과 쟁취의 신화’가 남긴 폐해의 심각성을 삶 가운데 받아들이는 일이 시급해 보입니다.
오늘의 인류사회는 새로운 역사의 동인을 요청합니다.
시대의 난제를 헤쳐갈 대안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인식의 지도’.
문명사적 난제를 풀어갈 ‘현실과 실천의 지도’.
종합적인 안목과 함께 미래의 지속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전환적 노력이 시급해 보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오늘은 내일의 현실을 만듭니다.
내일에 관한 깊은 성찰은 오늘의 방향성을 이끕니다.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맞은 오늘의 인류.
포괄적, 종합적 안목에 따른 실천 방안이 필요한 때입니다.
전일적 사유의 시대적 의미
경희 탄생 서사의 근원은 전일적 사유에서 비롯됐습니다.
‘전승화(全乘和).’
‘우주 내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
‘상관상제(相關相制)한다.’
‘상관상제의 연결망 속에서 결국 궁극의 조화 - 변전하는 세계의 보편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 - 를 향해 나아간다.’
그 명제와 함께 경희는 역사를 써내려 왔습니다.
미래를 준비해 왔습니다.
최근 양자 과학, 양자 인식론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중첩, 얽힘, 결맞음, 불확정성의 세계….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양자 세계는 중첩된 입자와 파동이 서로 얽혀 만들어 낸 무수한 ‘사건의 연속이자 진행 중인 과정’입니다.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양자론의 관점에선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아원자 세계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입자와 파동의 중첩,
순간적(instantaneous), 본질적(inherent) 양자 얽힘과 연결에서 비롯됩니다.
관찰자(인간)의 시선에 따라 때로는 입자로 때로는 파동으로 상태 중첩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경희의 설립 정신은 ‘주리(主理)·주의(主意) 생성’을 말합니다.
그 원리와 함께 창성(創成)과 변전(變轉)을 거듭하는 전일의 세계에 주목합니다.
우주의 이치가 생성하는 물질의 세계.
이와 동시에 존재하는 (우주) 의식의 세계.
그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현실을 만들어 가는 인간의 세계.
전승화는 양자 인식론과 유사하게, 물질과 의식, 비물질 세계의 유기적 결합과 사건의 지평에 시선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이 걸어야 할 보편 질서를 찾아 나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일사관(全一 事觀)은 경계와 환원, 분절 너머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전일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이 시대의 생각거리는 적지 않습니다.
‘물질세계의 성장이 행복을 불러온다.’
‘국가와 정치는 결국 그런 과정을 지켜내는 것이다.’
‘지금 맞닥뜨린 문명사적 위협도 첨단 과학기술이 풀어낼 수 있다.’
시대를 사로잡은 이와 같은 산업 시대의 가설은 전례 없는 진전을 이뤘습니다.
우리는 그 진전의 수혜자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위기는 우리가 성장과 팽창에 매진할수록 더 빠른 속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산업사회의 선형적 인과 고리를 넘어설 종합적 안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 다른 성찰적 과제도 있습니다.
근원적인 인식과 관찰의 문제입니다.
인식과 관찰의 주체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인간과 세계를 매개하는 우리의 의식.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산업혁명의 근간이 된 경계와 환원, 기계론적 과학 패러다임은 물리의 세계와 인간 의식 문제를 분리해 왔습니다.
과학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적 발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학계가 논의를 이어온 유물론, 유신론의 관점은 이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생성과 일상의 역사는 이보다 더 복잡한 연결과 상호작용의 기제를 갖습니다.
최근 화제가 된 논문이 있습니다.
물리학자(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로저 펜로즈)와 마취전문의(스튜어트 하메로프 박사)가 공동 집필한 연구논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전합니다.
‘인간 의식의 발현은 양자 과학의 미시세계, 인간 경험의 거시세계의 교량 역할을 하는 파동함수 붕괴에 따른다.’
파동함수 붕괴.
그 찰나의 과정, 혹은 현상은 인문·사회과학적 표현으론 전체와 부분, 존재와 인식의 뗄 수 없는 관계의 발현이자 상호작용의 ‘마지막 결과’일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경희 설립 서사의 기초인 전일사관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75주년, 그 후
전환의 시대입니다.
문명사의 한 축에선 희망의 징후가 이곳저곳에서 보입니다.
인간의 난치병과 지구 행성의 기후, 환경 문제를 풀어갈 유전공학, 지구공학의 출현.
복잡한 인간의 세상과 미래를 다룰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
우주의 끝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의 눈부신 활동.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공상과학의 소재였을 그런 일이 이제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사의 또 다른 측면은 앞서 소개한 지구적 위협과 위기, 재앙의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기아와 질병, 소외와 갈등.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는 전쟁과 테러의 기술.
이 같은 전통적인 위협에 더해져 기후, 핵, 파괴적 과학기술의 위협은 이제 문명사적 재앙의 폭넓은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와 학계,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시간이 다 돼 간다.’
‘더 이상 잃을 시간이 없다.’
‘인류는 지금 지구 운명(인류 종말)의 날 상징인 자정 90초 전을 통과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답은 비교적 자명해 보입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오랜 진화의 여정에서 인류는 생존과 안위, 기쁨을 위한 삶을 조형해 왔습니다.
특히 산업 시대 이후 그 방도와 기술이 전례 없는 속도로 진전됐습니다.
이 기간 만들어진 인간의 습성과 역사의 관성은 오늘도 그 진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길은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급진전하면 할수록 문명사적 폐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특이점’, 붕괴의 가능성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해야 할까.
인간의 욕망과 갈망을 위해 성장의 과실을 향유하면서, 재난의 가능성을 막을 길은 없는 것일까.
누구도 답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점은 인류가 달려왔던 그 길만으론 그 길이 자초한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에 팽배한 환원적, 분절적, 선형적 인과론.
그 너머 인식과 현실 세계에 대한 창조적 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전일사관.
‘모든 것은 얽힘과 연결의 지평에 놓여 있는 사건의 총합이다.’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전일적 사유는 우주와 지구, 사회적 맥락을 관류하는 보이지 않는 내면 현실이 현실의 동력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한 원로 과학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에 좋은 일은 부분에도 좋은 일이다.’
전일의 명제를 수렴하는 일.
사건의 지평을 연결과 결맞음, 불확정성 원리와 함께 품어 안는 일이 시대의 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해 보입니다.
노력의 결과와 상관없이….
호머(Homer)가 통찰했듯이 ‘삶의 그 어떤 순간이든 최후가 될 수 있습니다.’(Any moment might be our last.)
우리는 그 평범한 가능성을 열어둔 채 미래를 향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과정은 내 안의 초월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자, 통념과 편견 너머의 세계를 개척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이렇게 명명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신성한 사명(divine mission).’
인간은 스스로 쌓아 온 인식과 실천의 틀에서 시작해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가는 존재입니다.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한, 우리는 닫힌 인위의 세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존재하는 내면의 무한 가능성을 발견할 때까지 의식과 실천을 지구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해 갑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서 경희는 특유의 실천 세계를 모색해 왔습니다.
열린 우주의 공간에서 질서와 조화의 숙명을 포용하는 실천적 전일사관을 추구했습니다.
우주가 열어놓은 무궁한 세계와 함께 행성적 차원에서 전개하는 성찰의 미학, 실천의 미학.
이를 토대로 경희는 현대가 이룬 성취를 포괄하면서 미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섰습니다.
인간의 우주 안에 ‘행성적 가치(planetary values)’를 실현하는 의지적 실천, 공적 실천의 길을 열어왔습니다.
유한한 지구의 역사에서 ‘포월(包越)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
벗어나고 넘어서고 포괄하는 인간의 가능성과 함께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일.
그것이 75년 경희의 전통입니다.
‘학문과 평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인간과 지구, 우주 내 모든 생명체의 실존적 의미를 탐색해 온 것이 경희의 역사입니다.
서울 캠퍼스 경희고등학교 옆 언덕 위에는 아틀라스 조각상이 있습니다.
우주에 속한 인간 세계의 고뇌와 번민을 온몸으로 걸머진 듯한 그 형상은 자신과 세계의 향상을 위한 과업 수행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기의 시대는 또 다른 기회일 수 있습니다.
산업문명이 이룬 성취 위에 그것이 만든 포괄적 복합위기의 한계와 모순을 넘어서는 일.
그 일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 존재의 평화를 이어갈 새로운 지평일 수 있을 것입니다.
경희인 여러분의 창의적인 세계관과 경희의 전통, 전일사관이 조화를 이루는 미래가 도래하길 기원합니다.

75주년을 맞아 경희인 모든 분의 건강과 행복, 보람 있는 미래를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