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비 둔화와 폐기 규제로 럭셔리 산업의 재고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유럽연합(EU)이 미판매 의류와 신발의 폐기를 금지하면서 글로벌 럭셔리업계의 재고관리 전략이 전환기를 맞았다. 특히 폐기 수량과 사유까지 공개하도록 하는 규제는 환경 문제를 넘어 브랜드 평판과 경영 투명성, 경쟁사 간 정보 노출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럭셔리 소비 둔화, 할인시장에 드러난 재고 부담
블룸버그통신의 최신 보도에 따르면, 10월 초 글로벌 할인 플랫폼 육스(Yoox)에서는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스웨이드 스니커즈가 공식 판매가격의 절반 수준인 617유로에 판매됐다. 구찌의 베이지색 미니스커트는 약 50% 할인된 800유로, 버버리 티셔츠는 60% 할인된 200유로 미만이었다. 당시 육스에서 할인 판매된 이들 3개 브랜드 상품은 약 2,500개에 달했다.
이러한 사례는 고가 브랜드도 가격 인하와 재고 소진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럭셔리 기업들은 대규모 할인 판매가 정가 구매를 위축시키고 브랜드의 희소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고 처리에 신중해 왔다.
실제 소비 둔화는 실적에도 반영됐다. 세계 최대 럭셔리 그룹 LVMH의 2026년 3분기 매출은 185억 유로로 유기적 성장률이 1%에 그쳤다. 루이비통과 디올이 속한 패션·가죽제품 부문 매출은 중국 소비 위축 등의 영향으로 전년 동기 대비 5% 감소했다.
문제는 재고 처리 방법이 갈수록 제한된다는 점이다. 정가 판매를 고집하면 재고 보관과 자금 부담이 커지고, 할인 판매를 확대하면 브랜드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여기에 과거 일부 기업이 활용했던 소각과 파쇄마저 법적으로 제한되면서 생산부터 판매·회수까지 재고관리 체계 전반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EU, 2026년 폐기 금지 시행…2027년 정보공개 강화
EU 규제의 핵심은 2024년 7월 18일 발효된 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EU 2024/1781)이다. 이에 따라 2026년 7월 19일부터 EU 역내 대기업의 미판매 의류·의류 액세서리·신발 폐기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중기업에는 2030년 7월 19일부터 적용되며, 소기업과 영세기업은 금지 대상에서 제외된다.
정보공개 의무는 별도 규정으로 강화된다. 기업은 폐기물로 배출한 미판매 소비재의 수량과 중량, 폐기 사유, 재사용 준비·재활용·에너지 회수·최종 처분 등 처리 경로를 공개해야 한다.
2026년 2월 채택된 EU 이행규정 2026/2에 따른 표준 공시 형식은 2027년 3월 2일부터 적용된다. 해당 형식은 적용일 이후 시작되는 첫 번째 완전한 회계연도부터 사용하며, 기업은 회계연도 종료 후 12개월 이내에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기존 ESPR에 따른 정보공개 의무는 이보다 앞서 적용된다.
이는 기업들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던 재고 처리 실적을 상품군별로 비교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다만 개별 컬렉션의 판매 부진이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공시는 주로 관세품목분류에 따른 상품군 단위로 이뤄진다.
규제의 배경에는 상당한 환경비용이 있다. 유럽환경청(EEA)에 따르면 2020년 유럽 시장에 공급된 섬유제품의 4~9%인 연간 26만 4,000~59만 4,000톤이 사용되기 전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 영향은 최대 560만 톤의 이산화탄소환산량(CO₂e)으로, 휘발유 자동차 약 100만 대의 연간 배출량에 해당한다. 이는 럭셔리 제품만이 아닌 유럽 전체 섬유제품의 추정치다.
프랑스는 2022년부터 순환경제법에 따라 비식품 미판매 제품의 재사용·재활용 의무를 도입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파쇄 후 재활용을 허용하는 것과 달리 EU는 제품을 원래 용도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재활용까지 원칙적으로 '파괴'로 분류한다. 단, 법령이 정한 예외에 해당하면 허용될 수 있다.
버버리·케어링·프라다, 폐기 중단 선언과 실제 운영 사이
주요 럭셔리 그룹들은 EU 규제 이전부터 재고 폐기 중단을 약속했지만 정책의 범위와 공개 수준에는 차이가 있다.
버버리는 2017~2018 회계연도에 장부상 원가 2860만 파운드에 달하는 완제품을 물리적으로 폐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을 받았다. 이후 2018년 9월 미판매 완제품 폐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26년 환경정책 문서에서는 폐기를 '에너지 회수 여부와 관계없는 소각 또는 매립'으로 정의했다. 블룸버그는 이러한 표현이 파쇄 등 다른 처리 방식의 가능성을 남긴다고 지적했다. 버버리는 관련 질의에 별도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구찌·생로랑 등을 보유한 케링(Kering)은 2020년 그룹 전체의 제품 및 미판매 재고 파괴 금지를 선언했다. 이후 직원 판매와 기부, 업사이클링, 재활용을 확대하고 수요 예측에 머신러닝을 도입했다. 구찌는 '구찌 업(Gucci-Up)' 프로그램을 통해 2018~2023년 가죽 잔여물 111톤을 재사용했다. 다만 케링은 2025년 연차보고서에서 기존의 전면 금지 표현 대신 제품 파괴 방지에 관한 모든 관련 법규를 준수한다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러한 변경이 실제 폐기 재개를 의미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프라다그룹은 2023년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2024년부터 미판매 상품의 파쇄를 피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24~2025년 보고서에는 해당 목표의 이행 결과가 별도로 갱신되지 않았지만, 회사 측은 폐기 제로 정책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책 도입 이후 제품과 소재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기업의 공식 설명으로, 독립적으로 검증된 폐기 실적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LVMH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사업장에서 미판매 제품을 100% 기부·재사용·재활용한다는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미사용 원단과 가죽을 재판매하는 노나 소스(Nona Source)를 통해 2025년 원단 31만4,085m와 가죽 9,058㎡가 재사용됐다. 프랑스의 분류·해체 거점 세드르(CEDRE)에서는 같은 해 3,646톤의 소재와 제품을 재사용·회수·재활용했다. 다만 여기에는 미판매 완제품 외에 미사용 원자재와 다른 폐기물도 포함돼 있다.
에르메스 역시 2030년까지 모든 미판매 제품에 대한 재활용 경로를 구축한다는 목표다. 2025년에는 애프터서비스를 통해 9만6,000개 이상의 제품을 수리했다. 제품 수명 연장에서는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판매된 제품의 수리 실적과 미판매 재고의 처리 실적은 구분해야 한다.
핸드백 제외·재활용 허용 논란…규제 실효성 관건
EU 규제의 가장 큰 쟁점은 적용 품목과 예외 조항이다. 럭셔리업계의 핵심 상품인 핸드백은 현재 폐기 금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ESPR 부속서 VII은 의류·의류 액세서리와 신발 등을 금지 대상으로 지정한다. 가죽 의류는 포함되지만 핸드백이 속한 관세품목분류 4202는 제외된다. 다만 폐기 금지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미판매 소비재의 폐기정보 공개 의무까지 면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2026년 2월 채택된 EU 위임규정 2026/296은 안전·위생 문제, 복구하기 어려운 손상, 지식재산권 침해, 기술적·경제적으로 부적절한 수리 등을 폐기 예외 사유로 규정했다.
특히 로고와 상표, 식별 가능한 디자인 요소를 제거하거나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해 재사용·재제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에도 일정 요건 아래 폐기가 허용된다. EU 내 적절한 사회적경제 조직 최소 3곳에 기부를 제안하거나 웹사이트에 최소 8주간 기부 제안을 게시했지만 수령자가 없었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있다. 단순히 8주 동안 판매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기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예외는 규제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을 낳고 있다. 유럽의회 입법 과정에 참여한 사라 마티외 의원은 로고 제거가 어려운 제품에 예외를 적용하면 오히려 제거하기 어려운 디자인을 채택할 유인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재활용의 법적 지위도 논쟁거리다. 프랑스에서는 미판매 의류를 파쇄해 단열재나 카펫용 섬유로 전환할 수 있지만 EU는 이러한 처리도 원칙적으로 파괴로 본다. 업사이클링 전문기업 알 컬렉티브(R Collective)의 크리스티나 딘은 고가 제품을 저급 소재로 전환하는 방식이 원래 제품의 가치를 충분히 보존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프랑스 오트쿠튀르패션연맹(FHCM)은 고품질 재활용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순환경제 사회적기업 연합 알류즈(Rreuse)는 재활용 과정에서도 제품 자체가 파괴되며, 재생 소재가 반드시 다시 사용되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규제 집행 역시 과제다. 프랑스 당국은 2024년 섬유업계 110개 기업을 점검했으나 상당 부분은 교육과 제도 안내에 집중됐다. 위반 시 프랑스의 법인 대상 행정벌금 상한은 건당 1만5,000유로다. 이는 프랑스의 제재 기준으로 EU 전체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금액은 아니다.
EU는 기업이 재고 처리와 관련한 증빙자료를 5년간 보관하도록 하고, 2027년부터 적용되는 표준 공시체계를 통해 폐기 물량과 사유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관련 규정은 2031년까지 재검토될 예정이다.
향후 전망…생산량 조절과 순환경제 역량이 경쟁력 좌우
EU 규제는 럭셔리업계의 생산·유통·소재관리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수요 예측과 생산량 조절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폐기가 어려워질수록 과잉생산에 따른 비용 부담이 증가한다. 케링의 머신러닝 기반 수요 예측이나 샤넬의 주문 기반 생산 방식처럼 판매 데이터를 활용해 공급량을 정밀하게 관리하는 체계가 요구된다.
재판매와 할인 유통의 역할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폐기 대신 판매 가능한 재고를 회수해야 하지만, 무분별한 할인 확대는 브랜드 희소성과 가격 정책을 훼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웃렛과 재판매 채널을 활용하면서도 유통 물량과 가격을 통제하는 전략이 중요해질 전망이다.
재생 소재와 재제조 기술도 주요 투자 분야다. 샤넬의 네볼드, LVMH의 노나 소스와 세드르, 케어링의 업사이클링 사업은 재고와 미사용 소재를 새로운 자원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다만 단순한 파쇄·재활용보다 원래 제품의 가치를 유지하는 수선, 재사용, 고품질 재생 기술의 확보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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