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외동포청 주최로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세계한인대회' 참석차 고국을 찾은 김영기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 29일 행사장 옆 오크우드호텔 65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본지 인터뷰에 응한 모습이다. [인천=황복희 기자]
“유럽 한인사회도 이제 나이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김영기 유럽한인총연합회 회장이 유럽 한인사회의 고령화에 대비해 스페인에 고령 동포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한인 공동체’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한인사회가 차세대 육성에 힘을 쏟는 것과 함께 유럽 이민사를 일군 1세대 동포의 노후와 건강을 챙기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026 세계한인대회 참석차 방한한 김 회장은 29일 인천 송도컨벤시아 행사장에서 재외동포신문과 만나 유럽 한인사회의 현주소와 고령 동포 복지, 차세대 육성, 재외동포 정책, 그리고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유럽 생활과 태권도를 통한 스포츠외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김 회장은 현재 유럽 한인사회를 한마디로 “행복하고 화목하다”고 표현했다. 자신이 회장을 맡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도 한인사회 내부의 갈등을 줄이고 회원들이 편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지금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으로 고령 동포를 꼽았다.
“제가 한인회장을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인사회에 트러블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처우를 어떻게 개선할지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큰 사업을 새로 하겠습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는 게 중요하지요.”
유럽총연은 한국의 의료기관과 연계해 유럽 동포들이 방한했을 때 건강검진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도 마련했다고 김 회장은 설명했다. 그가 고령 동포의 의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유럽 이민 1세대가 처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간 독일이나 스페인 등에서 살아 일상적인 현지 언어에 익숙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질병이 생기면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자신의 건강 상태와 치료 과정을 우리말로 상세하게 설명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령 동포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스페인 남부에 고령 한인 공동체 구상
김 회장의 구상은 의료 지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유럽의 고령 한인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를 스페인에 조성하는 것이다. 막연한 아이디어에 그치지 않고 후보 지역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김 회장이 거론한 곳은 스페인 남동부 지중해 연안의 알리칸테 지역과 중부 카스티야라만차주의 시우다드레알·톨레도 일대다. 특히 자신이 오랫동안 생활해온 시우다드레알을 포함한 카스티야라만차 지역은 현지 사정과 행정기관 등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추진하기 편한 곳으로 보고 있다.
“알리칸테 지역이 있고요. 지금 생각 중인데, 제일 편한 것은 카스티야라만차, 시우다드레알이나 톨레도 그쪽입니다.”
김 회장은 한인 공동체를 조성할 경우 지방정부와 협의해 지원을 이끌어내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고령 동포를 위한 공동체라는 사업 취지를 설명하고 현지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하면 사업비 부담을 줄일 여지가 있다는 판단이다.
알리칸테를 후보지로 검토하는 데는 스페인의 온화한 기후와 유럽의 은퇴 문화가 배경에 있다. 김 회장은 북부 유럽의 은퇴자들이 겨울이면 상대적으로 따뜻한 스페인으로 내려와 장기간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유럽 한인사회에도 이런 노후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김 회장이 생각하는 것은 상업적인 ‘한인타운’이라기보다 고령 동포들의 주거·복지 공동체에 가깝다. 각자 자신의 주거공간과 생활비를 부담하되 한국 음식을 함께 먹고, 여가와 여행을 함께하며 필요할 때 서로 돌볼 수 있는 형태다.
특히 김 회장은 공동체 조성을 위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부지를 기증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걸 내가 파는 게 아니고 기증해서 거기서 가꾸고, 들어오시는 분들은 자기 방 하나는 자기가 내고 생활비도 각자 부담하는 식으로 하면 됩니다.”
김 회장은 공동체가 정부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입주자들이 가능한 범위에서 비용을 부담하고, 현지 지방정부 등의 지원을 더해 자립적으로 운영되는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김 회장의 생활 근거지는 카스티야라만차주의 시우다드레알이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일을 하지만 주거지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200㎞ 정도 떨어진 시우다드레알”이라고 설명했다. 유럽한인총연합회 사무실도 이곳에 두고 있다고 했다.
고령화 함께 그가 강조한 또 하나의 화두는 ‘차세대’였다.
김 회장은 재외동포사회가 차세대 육성에 힘을 쏟는 것은 당연하지만 ‘차세대’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모아 행사를 개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젊은 동포들이 실제로 배우고 경험하며 경제활동과 모국과의 연결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의 차세대 사업을 긍정적인 사례로 들었다. 차세대 동포들이 한국 기업과 연결돼 현지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고 이를 실제 비즈니스로 발전시키는 구조에 주목했다.
“차세대를 육성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제대로 하고, 실제 기업을 하는 분들이 뒤에서 도와주고, 한국 기업과도 연결해줘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무언가 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지요.”
김 회장은 각 동포단체가 비슷한 차세대 사업을 반복하기보다는 단체별 특성과 전문성에 맞춰 역할을 나누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차세대 사업의 성과 역시 참가자 수나 행사 횟수보다 이후 실제 활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한인총연합회 총회에서 제19대 회장으로 선출돼 연임에 성공했다. 단독 출마한 가운데 82명이 투표해 80명이 찬성했다. 지난 임기 동안 한인사회 권익 신장과 차세대 육성, 유럽과 모국 간 교류 확대 등에 힘써온 그는 앞으로도 이 같은 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김영기 회장은 올해 3월 2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한인총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제19대 회장에 선출되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스페인 태권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김 회장의 인생은 여느 유럽 이민 1세대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스페인으로 건너가기 전 그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다.
김 회장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서울시경에서 근무한 뒤 해외 경험을 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만 스물여섯 나이로 처음부터 유럽에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1년 정도 경험을 쌓은 뒤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독일에서는 태권도 사범들을 교육했다. 이때 해외에 먼저 정착한 한국인들의 실제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민자들은 직장을 다니며 가족을 부양하고 낯선 사회에서 기반을 닦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외국에 나오면 다 잘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선배님들이 정말 어렵게 사는 겁니다.”
독일 생활은 길지 않았다. 귀국하려던 그에게 스페인에서 태권도를 도와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한국 태권도계가 국제무대에서 태권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힘을 쏟던 시기였다. 김 회장은 스승의 권유로 스페인으로 향했고, 이 선택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1982년 스페인에 정착한 그는 이후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국가대표팀을 오랫동안 이끌었다. 김 회장은 1989년부터 2005년 초까지 대표팀을 맡았다고 밝혔다.
그의 태권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故)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다.
김 회장은 김운용 전 부위원장과 인연을 맺으며 태권도가 올림픽 무대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스페인 현장의 역할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특히 당시 IOC를 이끌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스페인 태권도계의 지지가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올림픽에 들어가려면 스페인이 굉장히 중요한 나라였다”며 당시 국제 스포츠계가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 등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스페인이 스페인어권 국가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운용 전 부위원장과 함께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태권도의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해 스페인 현지 태권도인들의 목소리를 IOC에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김운용 총재님 아이디어였어요. 저한테 얘기가 와서 우리 도장의 제자들에게 태권도가 올림픽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김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스페인 내 200여 개 태권도장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에게 태권도의 올림픽 채택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해외 현장의 태권도 사범과 수련생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보탰다는 얘기다.
김 회장은 스페인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국제대회와 올림픽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것이 스포츠외교의 힘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스포츠계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가 때로는 공식 외교 못지않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체감했다고 말했다.
그런 경험은 지금도 김 회장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태권도를 단순한 경기 종목이 아니라 사람과 국가를 연결하는 문화외교의 자산으로 보는 이유다.
해외 태권도 사범들이 한국 관광에도 일찌감치 역할을 했다고 그는 기억했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지만 해외 사범들이 여름이면 제자 20~30명씩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태권도 사범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한국에 많이 들어왔어요. 20명, 30명씩 데리고 오는 겁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국에 관광 오는 외국인이 많지 않았잖아요.”
태권도가 스포츠를 넘어 외국인들이 한국을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통로였던 셈이다. 오늘날에는 K-팝과 태권도를 결합하면 또 다른 한국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김 회장은 보고 있다.
스페인에서 이어온 ‘돈키호테컵’도 같은 맥락이다. 김 회장은 스페인 시우다드레알에서 열리는 국제 태권도대회인 ‘돈키호테 국제태권도오픈’을 통해 스포츠와 지역문화를 접목해왔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 ‘돈키호테’의 이름을 대회에 붙여 현지 친화도를 높였으며, 대회는 시우다드레알시와 지역 태권도계의 지원 속에 국제대회로 성장했다. 한국문화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기보다 현지 문화와 결합해야 더 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1세대도, 차세대도, 입양동포도 함께 가야”
40여 년 전 태권도를 들고 스페인으로 향했던 김 회장은 이제 유럽 한인사회의 세대교체를 고민하는 위치에 서 있다.
그가 생각하는 한인사회의 범위는 기존 교민사회에만 머물지 않는다. 입양동포 역시 한인사회가 적극적으로 품어야 할 구성원이라고 강조한다.
김 회장은 앞선 인터뷰에서도 유럽에서 살아가는 입양동포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한인사회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며 “한민족의 피가 섞인 사람들은 모두 동포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동시에 유럽 한인사회의 오늘을 만든 1세대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원양어업 종사자 등이 어려웠던 시절 고국에 외화를 보내며 경제 발전에 힘을 보탰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출발해 독일을 거쳐 스페인으로 향한 20대 청년은 태권도로 현지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과 인연을 맺으며 국제 스포츠외교의 현장을 경험했고, 이제는 유럽 각국 한인사회를 아우르는 유럽한인총연합회를 이끌고 있다.
그 긴 여정 끝에서 김 회장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보다 ‘사람’이었다. 젊은 동포에게는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나이 든 동포에게는 함께 살아갈 공동체를 만드는 것. 김 회장이 연임 임기 동안 풀어가려는 유럽 한인사회의 두 과제다.
유럽의 한인 리더로서 현지 고령 한인들과 차세대, 입양동포까지 함께 바라보고 있는 김영기 회장. [황복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