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재 월드옥타 전 광저우지회장이 9월 13일 중국 연길시에 위치한 연변대학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모습. [연길= 황복희 기자]
지난 13일 오전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연변대학교 정문 앞. 교문에는 한글 ‘연변대학’과 한자 ‘延邊大學’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전통 건축양식을 살린 큼지막한 교문 너머로 대학 본관이 눈에 들어왔고, 캠퍼스를 드나드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연길을 방문했으니 조선족의 역사와 교육을 상정하는 ‘민족대학’을 꼭 한번 가보라는 현지인의 추천으로 기대를 안고 찾았으나, 캠퍼스 입구에 설치된 안면인식 출입장치가 낯선 객을 막아섰다. 예전과 달리 외부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한글로 연변대학이라 적힌 정문을 바라보니 가슴 밑바닥에서 뭐라 콕집어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함이 올라왔다.
1949년 문을 연 연변대학은 조선족 사회와 함께 성장해온 대학이다. 조선족 교원과 인재를 길러내며 민족교육의 한 축을 맡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의학과 공학,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연길 한복판에서 조선족의 교육과 역사를 이어온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날 연변대학 방문에는 이민재 월드옥타(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 협회지원법추진위원장이 함께했다. 월드옥타 지회 창립 20주년 기념식 참석차 연길을 찾은 이 회장은 대학 주변과 시내 풍경을 바라보며 달라진 모습에 연신 감탄했다.
“연길이 정말 많이 변했네요. 예전에 왔을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연길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인 서시장 인근 한글로 ‘성수동 카페’라고 적힌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됐다.
4000달러 들고 광저우로…무역상에서 기업 컨설턴트로
“그냥 노트북 하나 메고 4000달러 들고 들어왔어요. 아는 사람도 없던 곳에요.”
이 회장은 2000년 광저우로 들어갔다. 광저우를 택한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여러 도시의 경제지표를 들여다봤는데 광저우의 성장세가 눈에 들어왔던 것. 해외자본도 활발하게 유입되고 있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전초기지였던 광둥성의 성도라는 점도 사업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중국을 전혀 모르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금성사와 진로, 인광그룹 등을 거치며 직장생활을 했다. 진로에서는 기획조정실 등에서 근무하며 인사·기획·관리 업무를 경험했고 해외지사 설립 업무로 베이징과 도쿄, 홍콩 등을 오갔다. 인광정보통신 대표이사를 끝으로 퇴직했다.
중국과의 인연은 인광그룹에 몸담으면서 깊어졌다. 회사 지원으로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상하이 푸단대에서 중문학을 공부했다. 평일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회사 일을 챙겼다고 한다.
그러다 직장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자기 사업을 해볼 것인지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광저우였다.
하지만 막상 광저우에 도착하니 무엇을 팔아야 할지부터가 문제였다. 집과 사무실을 얻은 뒤 직접 시장으로 나갔다. 차(茶) 시장부터 의류·완구·문구·가구 도매시장까지 발품을 팔았다. 시장에서 얻은 상품과 가격 정보를 정리해 당시 중국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정확하게 6개월 만에 첫 오더를 받았어요.”
첫 주문 가운데 하나가 완구였다. 이후 가구와 액자, 의류, 가방, 주방용품 등으로 취급 품목을 빠르게 늘렸다.
“안 해본 게 없어요.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했죠. 목탁도 보내봤어요.”
2002년부터 수년간 그의 회사는 사실상 작은 ‘종합상사’였다. 하지만 중국 시장은 빠르게 변했다.
알리바바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한국 바이어들이 중국 공장과 직접 연결되기 시작했다. 광저우 현지에서 공장과 상품을 찾아 연결해주는 것만으로 경쟁력을 갖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마침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급증하던 시기였다. 그 틈에서 이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찾았다. 기업 설립과 투자 타당성 검토, 세무·회계, 법률·행정 등을 지원하는 중국 진출 컨설팅이었다. 처음에는 무역과 회계·법률 자문의 비중이 7대3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컨설팅이 주력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그가 운영하는 청덕투자관리(광둥)유한공사, 줄여서 ‘청덕(靑德)’은 기업 설립부터 세무·회계, 결산, 법률 자문, 취업비자, 상표등록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현지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한때 고객사가 300개 안팎까지 늘었으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국 기업들의 중국 철수가 이어져 현재는 약 150개 고객사를 두고 있다.
“교민사회 뿌리내리려면 학교가 있어야”
광저우에 들어온 지 10년쯤 됐을 때 그의 삶에 또 한번 계기가 찾아온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이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교민들이 한국 선수단을 응원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체육회가 만들어지고 흩어져 있던 교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은 광저우 한인사회 수석부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교민사회 활동에 발을 들였다.
그러던 중 교민사회의 오랜 숙원이던 광저우한국학교 설립에 뛰어든다. 당시 광저우에는 한국학교가 없었다. 자녀 교육 때문에 국제학교나 중국 현지 학교를 선택해야 했고, 이는 교민 가족들이 광저우에 장기간 정착하는 데 적지 않은 부담이 됐다.
“교민사회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012년 광저우한국학교 설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이 회장도 설립 작업에 뛰어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건물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 회장은 중국 정부의 협조 아래 현지 건설업체와 장기 임대 계약을 추진했고, 10년치 임대료 2500만 위안(당시 약 50억원)을 일시불로 마련해야 했다. 한국 정부의 매칭펀드 지원과 함께 교민사회도 모금에 나섰다. 2~3년 동안 기업과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기부를 요청했다.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도망갈 정도였어요. 맨날 돈 달라고 하니까.”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 상황은 절박했다. 2016년 12월 31일이 임대료 납부 마감일이었는데, 열흘 전까지도 필요한 돈을 채우지 못했다. 이 회장 자신도 수천만원을 냈고, LG그룹은 대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5억원을 기부했다. 막판에 한 조선족 여성 기업인을 소개받으면서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얼마가 필요하냐 묻더니 익명을 조건으로 1000만 위안을 줬어요.”
당초 부탁한 금액의 10배였다. 이튿날 실제로 1000만 위안이 계좌에 입금됐다.
그렇게 기업과 교민, 조선족 경제인들의 힘을 모아 10년치 임대료를 일시불로 납부했고, 광저우한국학교는 장기간 안정적으로 사용할 학교건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훗날 이 회장이 한국인과 조선족 경제인이 ‘함께 가야 한다’고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됐다.
월드옥타 지회 20주년 기념식 참석차 연길 더블트리 바이 힐튼호텔을 방문한 이민재 전 광저우지회장. [황복희 기자]
“한국인이냐 조선족이냐보다 같이 가는 게 중요”
학교 설립을 계기로 이 회장의 한인사회 활동도 본격화됐다. 2017년 제23대 광저우한국인(상)회장에 선출됐고 제24대까지 연임했다. 회장을 맡기 전에는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며 교민사회 현안을 챙겼다. 2019년에는 중국 화남지역 한인사회를 아우르는 화남연합회장도 맡았다.
특히 광저우에서 한국인과 조선족 경제인들이 서로 벽을 낮추는 데 관심을 쏟았다.
“한국인이냐 조선족이냐보다 같이 가는 게 중요했죠.”
당시 광저우 한국인회에는 한국 국적 교민과 기업 주재원들이 주로 참여했고, 월드옥타에는 조선족 경제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같은 지역에서 사업하고 생활하는 경제인들이라면 서로 교류하고 힘을 합치는 편이 한인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그는 봤다.
이 회장 자신부터 한국인회장을 맡으면서도 월드옥타 광저우지회 수석부회장을 4년간 맡았다. 이후 월드옥타 광저우지회 제7대 회장까지 지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생각은 같다.
“서로 같이 가는 게 중요하지.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국의 한국 회원도 목소리 낼 수 있어야”
중국의 월드옥타 조직은 지역에 따라 조선족 경제인의 비중이 높다. 그는 한국 국적 회원들이 지회에 가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부 임원이나 위원회 등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에 있는 한국 회원 가운데 활동력 있고 추천할 만한 사람들을 발굴해서 직위를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도 발언할 수 있는 위치가 생깁니다.”
한국인과 조선족 경제인이 한 조직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서로의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면 중국 내 월드옥타의 외연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회장은 현재 월드옥타 협회지원법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앞서 정관 개정 관련 업무에도 참여했다.
그가 앞으로의 월드옥타에서 특히 중요하게 보는 것은 차세대다.
기성세대가 한국인과 조선족이라는 출신과 정체성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의식했다면 젊은 세대는 다르다고 그는 봤다. 한국 청년과 중국의 조선족 청년들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함께 사업할 기회가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세대라는 틀에 들어가 보면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마당이 있어요. 젊은 친구들은 서로 교류할 기회가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차세대 사업을 단순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보지 않는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한인 청년들이 만나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경제 네트워크로 이어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25년 동안 지켜본 중국 진출 기업의 부침
이 회장이 2000년 광저우에 들어온 뒤 2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한국 기업들이 앞다퉈 중국으로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으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분위기가 달라져 한국 기업의 철수와 사업 축소가 이어졌고 그의 회사 ‘청덕’의 고객사도 현재 약 150개사로 줄었다.
한인 인구도 예전 같지 않다. 이 회장은 현재 광저우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약 1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그럼에도 광저우 한인사회가 다른 중국 도시와 비교해 공동체의 기반을 비교적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학교’의 역할이 컸다고 그는 평가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학부모와 기업인, 교민들이 만나면서 공동체도 유지된다는 것.
그가 한국학교 설립을 자신의 한인사회 활동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일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광저우한국학교 학생은 약 450명이다. 사업가는 떠날 수도 있고 기업은 철수할 수도 있으나 학교와 다음 세대가 남아 있는 한 한인사회의 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회장에게 연길의 변화는 단순히 도시가 발전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중국의 조선족 사회도, 중국에 터를 잡은 한국인 사회도 이제 한 세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온 광저우도 변했고, 중국의 한인사회도 변했다.
변화 속에서 그가 얻은 답은, “서로 같이 가는 것.”
중국에서 25년을 살아온 이민재 회장이 연길에서 꺼내놓은 한인 경제공동체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