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수들을 응원하는 관중들.[류제영 재외기자]
“오늘은 나에게도 행운이 올까?”
태풍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8월 28일(현지시간) 저녁, 황푸강변에 자리한 상하이 웨스트번드 야구장. 한 중국인 관중이 글러브를 손에 꼭 쥔 채 외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주에도 경기장을 찾았다는 그는 이닝이 바뀔 때마다 외야수들이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주는 모습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혹시 자신에게도 공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기대에 이날은 아예 글러브까지 챙겨왔다.
누군가 공을 잡으면 자신의 차례가 아니어도 함께 환호했다. 전광판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추면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손을 흔들거나 몸을 흔들었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관중을 넘어, 자신도 경기의 한 장면이 된 듯했다. 그 옆에는 태극기와 태극무늬가 그려진 소고를 든 한국 학생들이 있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상하이 한국학교 학생과 학부모 등 한국인 관중은 150여 명. 한국 야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직적인 응원단이나 응원가는 없었지만, 안타와 홈런이 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소고를 흔들고 태극기를 들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선수들을 응원했다.
특히 3회초 홈런이 터지자 관중석에서는 큰 환호성이 터졌다. 야구장을 처음 찾았다는 상하이 한국학교 이윤후 학생(중2)은 홈런을 날린 37번 도미니크 선수를 응원한다고 했다.
오르카스팀을 응원하는 한국학교 학생과 학부모들.[류제영 재외기자]
어느 나라 선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잘하는 선수가 좋아요.”
이날 상하이 야구장의 풍경은 올해 처음 출범한 중국야구도시리그(CPB)가 만들어낸 새로운 장면이기도 했다.
중국야구협회(CBA) 산하 중국야구도시리그 CPB에는 올 시즌 상하이 오르카스를 비롯해 베이징 룽스, 선전 블루삭스, 푸저우 하이샤, 샤먼 돌핀스, 창사 왕왕 등 6개 구단이 참가한다.
8월 13일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45경기를 치르고, 9월 21일부터 플레이오프, 26일부터 챔피언결정전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상하이 오르카스에는 한국 야구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합류했다. LG 트윈스 출신 김용달 감독이 팀을 지휘하고, 최경환 타격·작전코치와 강영식 투수코치가 코칭스태프로 참여했다. 대만인 코치 2명도 함께한다. 선수와 감독·코치 등 한국 야구인만 16명이다.
지난 8월 11일에는 상해 한국상회 주도로 선수단 환영식과 팬 사인회가 열렸고, 13일 베이징 룽스와 역사적인 개막전을 치르며 CPB 첫 시즌의 막이 올랐다.
한국 야구인들의 중국 진출을 기획한 인물은 최해웅 중국야구협회 및 중국프로야구연맹 한국 대표다.
재중야구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2020년 중국야구협회를 직접 찾아가 프로야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한국의 프로·엘리트 출신 선수와 지도자들이 활동할 새로운 시장으로 중국을 주목하면서다.
특히 성장하는 중국 유소년 야구시장에 주목해 중국을 한국 선수들의 전지훈련 시장으로 연결하고, 선수뿐 아니라 코치와 감독 등 전문 야구인력의 중국 진출로 이어지는 새로운 야구 생태계를 구상했다.
최 대표는 “한국의 프로 및 엘리트 은퇴 선수들이 새롭게 출범한 CPB를 통해 선수로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 다양한 국가 선수들과 경쟁하며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이 경험이 다시 한국 프로야구로 복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야구는 아직 대중적인 스포츠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날 경기장 전광판도 중국어로 표시됐고, 야구를 처음 접하는 관중에게는 생소한 용어가 적지 않았다. 한국 야구장에서 익숙한 응원단이나 응원가 등 체계적인 팬 문화도 아직 자리 잡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야구가 주는 즐거움은 국적과 상관없이 통했다. 한국 선수들이 등장할 때면 영화 ‘첨밀밀’의 OST로도 잘 알려진 중국 음악 등 관중에게 친숙한 선율이 경기장에 흘러나왔다. 낯선 야구장에서 익숙한 음악이 들려오자 관중석에서는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한때 최대 8개, 베이징에서는 12개에 이르는 야구동아리가 활동할 정도로 생활야구의 인기가 있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활동이 크게 위축됐지만, 올해 CPB의 출범은 중국 야구에 새로운 무대를 열었다.
한국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의 반응을 보며 다음 경기에는 북과 꽹과리 등 한국 야구장의 응원도구를 가져오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김용달 감독 역시 교민사회에 이 팀을 ‘우리 팀’이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했다.
한국상회 주최로 진행된 환영식.
아직 중국 야구장에는 한국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응원단과 응원가, 응원도구 등 팬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관중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상하이 오르카스의 주말 3연전은 더욱 기분 좋은 결과로 마무리됐다. 오르카스는 푸저우 하이샤를 상대로 5-1, 6-5, 6-1로 세 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경기장을 처음 찾은 학생들에게는 생애 첫 야구경기가 됐고, 글러브를 들고 온 중국인 관중에게는 다음 경기를 기다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2020년 한 한국인이 중국야구협회를 찾아가 그렸던 새로운 야구시장의 구상은 이제 6개 도시의 팀이 뛰는 현실이 됐다.
오르카스는 그라운드에서 승리를 쌓았다. 그러나 이날 상하이 야구장에서 더 눈에 띈 것은 관중석의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