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축적'과 중국의 '추격' 속에서 K뷰티는 기술력 시험대에 올랐다. 사진= ChatGPT AI 생성 이미지
K-뷰티가 글로벌 시장에서 전례 없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수출은 연이어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는 신흥 한국 브랜드들이 빠르게 유통망을 넓히고 있다. 일부 브랜드와 제품에 국한됐던 K-뷰티는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뷰티 카테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산업의 외형이 빠르게 커진 만큼 성장의 지속 가능성도 점검할 시점이다. K-뷰티는 새로운 성분과 제형을 빠르게 제품에 적용하고 발달한 OEM·ODM 생태계를 활용해 단기간에 제품을 출시하는 ‘속도’를 핵심 경쟁력으로 성장해왔다.
대규모 생산설비나 오랜 업력을 갖추지 않은 신흥 브랜드도 상품 기획과 마케팅 역량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해외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민첩성은 기존 글로벌 화장품 기업과 차별화되는 K-뷰티의 핵심 경쟁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글로벌 화장품 시장의 경쟁 기준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더마와 고기능성 스킨케어 시장이 확대되면서 빠른 제품 출시뿐 아니라 기술력과 임상 데이터, 독자 원료와 지식재산 등 장기간 축적되는 자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더마 뷰티 시장은 2025년 약 64조원에서 2026년 약 70조3000억원으로 확대됐으며, 연평균 10.5%의 성장세를 이어가 2034년에는 약 156조4000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더마 뷰티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화장품 산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시장 규모는 2020년 7893억원에서 2025년 1조5557억원으로 약 2배 가까이 확대됐으며, 더마코스메틱과 메디컬 뷰티를 함께 집계할 경우 2022년 기준 4조원 이상의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마 뷰티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14.5%로 전망되며, 이 가운데 더마 스킨케어는 15.7%의 성장률이 예상된다. 국내 전체 스킨케어 시장에서 더마 스킨케어가 차지하는 비중도 20%에 육박한다.
소비자가 효능과 안전성, 임상 근거를 중시하면서 브랜드 경쟁의 기준도 독자 원료와 피부과학 기술, 임상 데이터 등 장기적으로 축적되는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프랑스는 약국 유통망과 온천수 자산으로 더마 강국에 올라섰다.
임상·R&D로 쌓는 글로벌 시장 더마 경쟁력
프랑스는 글로벌 더마 뷰티 시장을 주도해온 대표 국가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글로벌 더마뷰티 시장에서 프랑스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5%이며 글로벌 화장품 수출 시장에서도 약 2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화장품협회 집계 기준 연간 화장품 수출액도 한화 약 33조원을 넘어섰다.
프랑스는 약국 중심의 유통망과 피부과학 연구, 온천수를 비롯한 브랜드별 독자 원료와 연구 자산을 기반으로 글로벌 더마 시장의 경쟁력을 구축해왔다. 라로슈포제와 아벤느, 바이오더마, 비시 등 다수 브랜드가 대표적인 글로벌 더마 브랜드로 성장했으며, 국내에서도 올리브영과 무신사 등 주요 유통망을 통해 안정적인 판매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로레알에 따르면 라로슈포제는 다양한 피부 유형과 연령대를 대상으로 800건 이상의 임상 연구를 진행했다. 로레알 더마톨로지컬 뷰티 사업부 역시 2025년 전 세계 32만명의 헬스케어 전문가와 접점을 구축했다고 밝혔다.
아벤느를 보유한 피에르파브르는 2025년 더모코스메틱 부문에 6300만유로를 연구개발비로 투입했다. 해당 부문 매출의 3.6% 수준이다. 더모코스메틱 연구조직에는 약 400명의 R&D 인력이 있으며 프랑스와 해외에서 총 5개 연구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 화장품 기업들도 기술과 연구개발을 브랜드 경쟁력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프로야는 2025년 브랜드 매출 한화 약 1조 5200억원 중 2.05%를 연구개발에 투자했으며 연구인력 334명, 유효 특허 303건을 보유한 것으로 공시했다. 위노나를 운영하는 베타니는 같은 해 매출 한화 약 8800억원 중 4.71%를 R&D에 투입했다. 회사가 공개한 연구성과에는 유효 특허 350건, SCI 및 핵심 학술지 논문 653편, 신원료 승인 29건 등이 포함돼 있다.
중국 기업들은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기존 강점인 마케팅 전략도 공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프로야의 2025년 브랜드 프로모션·광고비 비중은 매출의 44.03%에 달했다.
프로야, 퍼펙트다이어리, 위노나, 유니스킨 등 중국 브랜드 14곳은 올해 8월 영국 런던에서 공동 팝업스토어 ‘옌랩(YANLAB)’을 열었다. 개별 브랜드를 넘어 ‘C-뷰티’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려는 시도다. K-뷰티가 공동의 국가 이미지를 활용해 해외 시장에서 카테고리화에 성공한 방식과 유사한 전략이다.
중국이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와 동일한 수준의 브랜드 파워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빠른 제품 개발과 디지털 마케팅, 온라인 유통 역량을 흡수하는 동시에 연구개발을 강화하고, 최근에는 한국 제조업체와 협업하거나 국내 생산을 활용해 기술력과 ‘한국 생산’ 이미지를 함께 내세우는 사례도 늘고 있다. K-뷰티의 강점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중국 브랜드의 확장은 국내 업계에 새로운 경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대규모 R&D 투자와 공격적 마케팅으로 더마 경쟁력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사진=ChatGPT AI 생성 이미지
마케팅 ‘치킨게임’ K-뷰티…기술 자산화가 관건
글로벌 시장에서 신규 소비자를 확보하고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마케팅 투자가 필수적이다. 다만 OEM·ODM 산업의 발달로 제품 출시 문턱이 낮아지고 유사한 성분과 콘셉트의 제품이 빠르게 늘면서 브랜드 간 경쟁이 광고와 인플루언서, 플랫폼 노출, 유통망 확보 등 마케팅 영역에 과도하게 집중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2025년 주요 뷰티기업 공시를 보면 달바글로벌의 광고선전비는 매출의 23.2%, 마녀공장 19.1%, 클리오 18.1%, 에이피알 17.5%, 브이티 13.5% 수준으로 나타났다.
특히 더마와 고기능성 스킨케어처럼 장기간 연구와 임상 축적이 필요한 시장에서는 마케팅 중심의 성장만으로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화장품 업계 역시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연구개발과 기술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24년 국내 화장품산업 연구개발비는 1조5133억원으로 전년 대비 16.3% 증가했다.
특히 코스맥스는 2025년 약 1367억원, 매출의 5.70%를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같은 해 말 기준 등록 특허 828건, 특허 출원 1908건, 기능성화장품 심사·보고 관련 성과 1790건을 공시했다. 한국콜마도 연결 기준 연구개발비 약 1553억원, 매출 대비 5.58%를 기록했다. 다만 해당 수치에는 제약 등 계열 사업의 연구개발비가 포함돼 있어 화장품 부문 연구개발비와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내 제조사의 연구 역량 자체가 부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력이 얼마나 개별 브랜드의 독자적인 자산으로 축적되고 있느냐다.
ODM 기업의 기술과 제형을 다수 브랜드가 활용할 수 있는 구조에서는 제품 차별성이 빠르게 희석될 수 있다. 반면 독자 원료와 특허, 자체 임상 데이터, 의료전문가 네트워크는 시간이 쌓일수록 모방하기 어려운 자산이 된다. 제조사의 연구성과를 개별 브랜드의 기술 헤리티지와 소비자 신뢰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속도 위에 기술 쌓아야”…K-뷰티 장기 경쟁력 과제
국내에도 에스트라를 비롯해 피부과학과 임상, 바이오 기술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브랜드와 기업들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PDRN, 펩타이드, 엑소좀 등 고기능성 원료와 피부과학을 강조하는 제품도 빠르게 늘고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기술 경쟁력을 개별 제품의 차별화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와 산업의 장기 자산으로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는 수십 년에 걸쳐 더마 브랜드의 연구성과와 의료 네트워크를 축적했고, 중국은 K-뷰티가 강점을 보여온 제품 개발 속도와 마케팅 역량을 흡수하는 동시에 연구개발까지 강화하고 있다. K-뷰티 역시 빠른 시장 대응력을 유지하면서 독자 기술과 임상 데이터, 지식재산 등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자산을 함께 쌓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K-뷰티의 성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이 산업의 자산으로 남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K-뷰티가 지금 짓고 있는 것이 수십 년간 이어질 글로벌 뷰티 산업의 기반인지, 빠른 성장에 비해 기초가 약한 ‘모래 위의 집’인지는 앞으로의 기술 자산 축적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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