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26일 중국 선양의 한 식당에서 김성민 총영사가 본지 기자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
20여 년 넘게 대학 강단에서 ‘사람의 통일’을 주창했던 인문학자가 이제 중국 동북3성의 외교 현장에서 ‘사람의 교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김성민 주선양대한민국총영사다.
김 총영사에게 선양은 단순한 해외 근무지가 아니다. 교수 시절부터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연구하며 수없이 찾았던 동북3성의 중심도시다. 학자로 연구했던 현장에 외교관으로 돌아온 셈이다. 지난 8월 26일 선양 시타거리의 한 식당에서 김 총영사와 안성규 전 민주평통 선양협의회 회장 등 4명이 간단한 점심을 하면서 나눈 대화다.
그가 요즘 가장 관심을 쏟고 있는 과제 가운데 하나는 내년 한중수교 35주년이다. 특히 이를 계기로 선양에 한국문화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베이징과 상하이에는 한국문화원이 있지만 정작 한국과 역사·문화적으로 밀접한 동북3성의 중심도시 선양에는 없다.
김 총영사는 “선양은 고대사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며 “동북3성은 우리의 민족사와 궤를 같이해 온 만큼 역사성과 문화성, 인문교류를 위한 한국문화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문화원은 단순히 K팝이나 한식을 알리는 문화홍보 시설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 시민, 조선족 동포, 나아가 이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공공외교의 플랫폼이다.
“우리만의 공간이 있다면 보다 다양한 문화행사를 안정적으로 열 수 있습니다. 각국 외교 관계자와 세계 각국의 시민들을 초청해 김치축제나 김장 체험 같은 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김 총영사는 한중수교 35주년을 문화원 설립 논의를 본격화할 좋은 계기로 보고 있다. 관련 아이디어를 모으고 주중한국대사를 비롯해 중국 측 관계자들에게도 필요성을 적극 설명해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그가 선양을 주목하는 데는 역사적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으로 구성된 동북3성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 북한·러시아·몽골과 이어지는 대륙의 관문이다. 또한 한중수교 이후 한국 기업들이 비교적 일찍 진출해 산업기반을 구축했고 지방정부와 기업, 시민사회의 교류가 오랫동안 축적된 지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선양에서 개최된 한국주 행사에서 K-POP공연이 열리고 있는 장면.
하지만 김 총영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는 것은 ‘사람’이다. 특히 동북3성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조선족 동포를 한중관계의 중요한 가교로 평가한다. 한국과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오랜 시간 쌓아온 이들의 신뢰와 네트워크는 정부나 기업만으로 만들기 어려운 자산이라는 것이다. 선양 시타거리가 한중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대표적인 공간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통일의 전제는 ‘소통·치유·통합’
이러한 김 총영사의 시각은 외교관이 된 뒤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학문적 이력과 맞닿아 있다. 그는 교수 시절 기존의 정치·경제·안보 중심 통일론에서 벗어나 철학과 역사, 문학 등을 결합한 ‘통일인문학’을 개척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제도와 영토가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진정한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통일은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면서 통일도 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그는 교수시절, 철학·문학·역사·정신분석학 등의 연구자들을 모아 대규모 연구단을 꾸렸다. 연구는 남북한 주민에 머물지 않았다. 탈북민과 재중조선족, 재러고려인, 재일조선인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연구대상을 넓혔다. 그렇게 ‘체제의 통일’을 넘어 ‘사람의 통일’이라는 새로운 통일담론을 제시했다.
그가 통일을 바라보는 핵심어는 ‘소통·치유·통합’이다. 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제강점과 분단, 이주를 경험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역사적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만큼 통일담론 역시 한반도라는 영토를 넘어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연결하는 문제까지 확장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선양을 비롯, 동북3성은 그에게 특별한 연구 현장이었다. 바로 미래 통일의 연습장이라는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20년 동안 매년 두어 차례 연변대학을 찾았고 두만강포럼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길림사회과학원과 길림대, 연변대, 훈춘 등 동북3성 곳곳을 다니며 한반도 평화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연구의 현장에 외교관으로 서 있다.
“제자들에게 늘 개념에만 멈춰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체적 지혜와 결합하지 않은 사유는 공허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확산과 실천적 적용입니다.”
교수 시절 연구실에서 고민했던 ‘소통·치유·통합’이라는 화두가 선양에서는 현실의 외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 총영사는 실제 선양에 와보니 자신이 20년간 연구했던 문제들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조선족과 한국인, 중국인 사이에 때로는 보이지 않는 편견과 집단적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북3성의 관문인 시타거리.
그런 의미에서 그가 추진하려는 선양한국문화원은 자신의 학문과 외교가 만나는 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를 통해 만나고, 만남을 통해 편견을 줄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중수교 이후 35년 동안 양국 관계는 경제와 교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앞으로의 35년은 경제를 넘어 사람과 문화, 역사에 대한 상호 이해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 김 총영사의 생각이다.
선양은 그 가능성을 실험하기에 상징성이 큰 도시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살아 숨 쉬고, 한국 기업과 중국 산업이 만나며, 조선족 동포가 양국을 연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한중수교 35주년을 앞두고 그가 제안하는 선양한국문화원 역시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답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문화를 나누고 서로의 역사와 상처를 이해하는 공간. 김 총영사는 그곳에서 한중관계의 새로운 35년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