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업계가 재고·조달까지 ‘기후 적응’ 전환에 나서고 있다. 사진=AI생성이미지(ChatGPT)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이 글로벌 패션산업의 계절 공식과 공급망 운영방식을 동시에 깨트렸다. 더위가 길어지면서 가을상품 판매 시점이 늦춰지고 여름상품 수요가 단기간에 급증하는가 하면, 오프라인 매장 방문 감소와 물류·생산시설의 냉방 부담도 커졌다. 기후변화 대응의 중심도 탄소배출 감축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재고와 조달, 생산설비까지 폭염에 맞게 바꾸는 ‘기후 적응’으로 확장되고 있다.
서유럽 기록적 폭염…‘9월이면 가을옷’ 공식 흔들
EU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에 따르면 2026년 6월 유럽 육지 평균기온은 19.14℃로 1991~2020년 평균보다 1.78℃ 높아 역대 두 번째로 더운 6월이었다. 특히 서유럽은 평균 20.74℃로 평년보다 3.06℃ 높아 관측 사상 가장 더운 6월을 기록했다. 서유럽의 6~7월 평균기온 역시 관측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국가별 기록도 극단적이었다. 프랑스 기상청에 따르면 올여름 프랑스 평균기온은 24.0℃로 평년보다 3.6℃ 높아 1900년 관측 이후 가장 더웠다. 폭염은 세 차례에 걸쳐 총 53일 이어졌고 국토의 45%에서는 한 차례 이상 40℃ 이상의 최고기온이 관측됐다. 강수량도 평년보다 약 40% 적었다. 영국 역시 6~8월 평균기온이 16.5℃로 188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변화는 전통적인 S/S와 F/W 중심의 패션 캘린더를 흔들고 있다. 파이버2패션(Fibre2Fashion)은 고온이 9월까지 지속되면 코트·니트 등 가을상품이 매장에 들어오는 시기에도 소비자는 린넨 셔츠·쇼츠·민소매 등 여름제품을 찾게 돼 기존 머천다이징 방식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판매실적만으로 시즌별 수요를 예측하기보다 지역별 기온과 단기 기상예보를 재고 배분에 직접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름옷은 팔렸지만 매장 방문은 감소…온·오프라인 양극화
폭염이 패션 소비에 미친 영향은 양면적이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6월 의류점 판매량은 전월보다 1.9% 증가해 2025년 9월 이후 가장 큰 월간 상승폭을 기록했다. 더운 날씨와 판매촉진 행사가 여름 의류 수요를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극심한 더위가 이어지면서 오프라인 소비에는 부담이 나타났다. ONS 실시간 지표에서 6월 영국 소매점 방문객은 5월보다 8%, 도심 상권 방문은 9% 감소했다. 영국소매협회(BRC)에 따르면 같은 달 비식품 오프라인 판매는 전년 대비 1.1% 줄어든 반면 온라인 비식품 판매는 5.1% 증가했다. 비식품 판매에서 온라인 비중은 39.0%까지 상승했다. 7월에는 폭염으로 매장 유입이 줄면서 의류 판매도 다시 하락했다.
폭염이 단순히 ‘여름옷 판매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군과 판매시기, 채널까지 동시에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한 셈이다.
글로벌 브랜드도 대응에 들어갔다. H&M의 다니엘 에르베르 CEO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길어지는 여름에 대응해 가을 컬렉션에 보다 가벼운 소재를 적용하고 있으며 특히 남유럽 등 고온지역을 중심으로 상품 구성을 조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부터 재킷과 니트를 본격적으로 배치하는 기존 ‘백투스쿨’ 시즌 전략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유니클로는 폭염이 판매기회 자체를 제한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파이낸셜 타임즈에 따르면 유럽 폭염 기간 일부 유니클로 매장은 임시 휴점하거나 영업시간을 단축했다. 운영사 패스트리테일링은 이에 따라 매장 냉방설비와 영업방식, 상품 구성을 재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실제 유럽 시장에서는 린넨 셔츠와 반소매 니트 등 여름상품과 시즌 구분이 상대적으로 약한 제품이 판매 호조를 보였다.
더 큰 위험은 생산기지…폭염·용수난이 납기 흔든다
판매 현장보다 장기적인 위험은 생산과정에 있다. 글로벌 의류 생산의 주요 거점인 방글라데시·베트남·캄보디아·파키스탄 등은 이미 고온다습한 지역으로 열 스트레스 위험이 높은 국가들이다.
ILO의 베터 웍스, 국제금융공사(IFC), 코넬대 글로벌노동연구소(GLI)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폭염과 홍수가 심화되고 별도의 적응조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들 4개국 의류산업은 2030년까지 잠재 수출수익을 최대 658억 달러를 잃고 신규 일자리 창출도 약 100만개 줄어들 수 있다. 2050년 고용 규모는 기준 시나리오보다 864만 명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제시됐다.
열 스트레스는 생산성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다. OECD가 23개국 270만개 이상 기업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간 35℃를 넘는 날이 10일 추가될 경우 기업 노동생산성은 평균 0.3% 감소했고, 최소 5일간 지속되는 폭염이 한 차례 추가되면 약 0.2% 낮아졌다. 습도가 높고 바람이 약할수록 영향은 더 커졌다.
이에 따라 글로벌 패션기업의 공급업체 평가기준도 가격·품질·납기에서 냉방·환기 능력, 용수와 전력 안정성, 폭염 시 작업시간과 휴식·급수체계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가뭄 역시 섬유산업에 직접적인 위험이다. EU 공동연구센터(JRC)에 따르면 올여름 프랑스·독일 남부·이탈리아 북부와 다뉴브 유역 등 유럽 주요 지역에서 가뭄 경보가 지속됐다. 염색·표백·세탁 등 물 사용량이 많은 섬유 습식공정에서는 용수 부족이 곧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폐수 재이용, 저욕비 염색, 막여과 등 물 절감 설비가 ESG 차원을 넘어 생산 연속성을 확보하는 투자로 바뀌는 이유다.
물류에도 이상기후의 파장이 나타났다. 독일 라인강은 8월 낮은 수위로 선박 적재량이 제한돼 일부 화물이 철도와 트럭으로 전환됐다. 8월 말 비가 내린 뒤에도 주요 운송지점인 카우브 수위는 72㎝에 그쳐 완전 적재에 필요한 약 1.5m를 크게 밑돌았다. 현재 공개자료상 패션기업의 대규모 배송 차질이 직접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원료·화학제품·연료 운송 차질은 유럽 섬유·패션 공급망 역시 같은 위험에 노출돼 있음을 보여준다.
‘최저가’보다 ‘최저위험’…기후 데이터가 조달 경쟁력
글로벌 패션업계의 대응 방향은 분명해지고 있다. 첫째, 국가와 도시별 기온을 반영해 상품 출시 시기와 소재를 조정하는 ‘기후 기반 머천다이징’이다. 둘째, 날씨·판매·재고 데이터를 연결해 고온지역에는 여름상품을 추가 배치하고 기온이 낮아진 지역에는 가을상품을 앞당겨 보내는 실시간 재고 재배분이다.
셋째는 생산지역 분산이다. 아시아 대량생산 기반을 유지하면서 튀르키예·포르투갈·북아프리카·동유럽 등 근거리 생산을 병행하면 수요 변화에 대응하는 리드타임을 줄일 수 있다. 다만 남유럽과 지중해 지역 역시 폭염·가뭄 위험이 높아 니어쇼어링 자체가 기후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생산국을 단순히 늘리는 것보다 폭염·홍수·가뭄이 동시에 발생하지 않도록 기후위험의 상관관계를 낮춘 공급망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섬유패션업계에도 기회와 과제가 동시에 열린다. 유럽의 여름 장기화가 이어질 경우 린넨·면·재생셀룰로오스 혼방, 경량 직물, 흡한속건·수분관리·UV 대응 소재 등 고온 환경에 적합한 섬유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베트남·캄보디아·방글라데시 등에 생산기지를 둔 국내 벤더들은 냉방·환기, 용수, 전력, 작업시간 관리 등을 공급망 리스크 관리에 포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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