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산실적 1000억원 이상 책임판매업체는 전체의 약 0.14% 수준으로 21곳에 불과하다. 사진=Chat GPT AI 생성이미지
국내 화장품 시장의 진입 문턱은 낮아졌지만 성장 문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OEM·ODM 산업의 발달로 자체 생산시설 없이도 브랜드를 출시할 수 있게 되면서 시장에 뛰어드는 사업자는 급증했지만, 실제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자본과 유통, 물류, 마케팅 역량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따르면 국내 화장품 책임판매업체 수는 2025년 2만8412개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화장품 제조업체는 4158개로 집계됐다.
시장 참여자가 빠르게 늘어난 것과 달리 산업 자체의 성장 속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국내 화장품 총 생산실적은 2024년 17조5426억원에서 2025년 17조9382억원으로 2.3% 증가해 역대 최대를 다시 경신했다. 그러나 시장 규모보다 참여자가 빠르게 늘면서 하나의 브랜드가 확보할 수 있는 소비자와 유통 기회를 둘러싼 경쟁은 그만큼 치열해졌다.
실제 시장 진입과 실질적인 생산 성과 사이에도 상당한 간극이 나타난다. 2025년 전체 책임판매업체 2만8412곳 가운데 생산실적을 보고한 업체는 1만5342곳으로 약 54% 수준이었다.
그러나 일정 규모 이상으로 올라선 기업이 극소수에 집중돼 있다. 2025년 생산실적 1000억원 이상 책임판매업체는 21곳으로 전체 생산실적 보고업체 1만5342곳의 약 0.14% 수준이다.
2025년 상위권에서는 기존 대기업과 함께 신흥 K-뷰티 기업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식약처 생산실적 기준 LG생활건강은 3조9185억원으로 전체의 21.8%, 아모레퍼시픽은 3조256억원으로 16.9%를 차지했다. 두 회사만으로 전체 생산액의 38.7%에 달했다.
에이피알은 생산실적이 2024년 1026억원에서 2025년 2850억원으로 늘며 순위가 21위에서 4위로 뛰었다. 구다이글로벌은 1092억원에서 1841억원으로 증가하며 18위에서 9위로, 비나우는 1087억원에서 1662억원으로 늘며 19위에서 11위로 상승했다.
시장의 저변은 소규모 조직이 압도적으로 넓지만, 그 위에서는 일부 기업이 불과 1년 사이 생산 규모를 두 배 이상 키우며 순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K-뷰티 시장의 경쟁이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느냐’보다 ‘브랜드를 얼마나 빠르게 키울 수 있느냐’에서 갈리고 있다는 의미다. 진입 장벽이 낮아진 만큼 성장 단계에서의 격차는 더 선명해지고 있다.
특히 초기 브랜드를 일정 규모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는 제품 기획과 생산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시장 반응을 수십억~수백억원대 매출로 연결하려면 수요 예측과 재고관리, 생산 리드타임, 광고 집행, 유통망 확보까지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ODM 업계 관계자는 “10억원에서 100억원 규모로 성장하는 구간에서는 수요 예측과 재고관리, 생산 리드타임, 원가 경쟁력 등이 동시에 문제가 된다”며 “초기에는 하나의 히어로 제품을 빠르게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매출이 커질수록 이를 뒷받침할 생산·유통 인프라와 함께 히트를 이어갈 후속 제품 라인업을 얼마나 탄탄한 브랜드 전략 아래 구축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전했다.
브랜드가 해외로 확장할수록 성장의 난도는 한층 높아진다. 국내에서 제품이 팔리는 것과 여러 국가에서 안정적으로 판매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가별 인허가와 통관, 현지 물류와 재고, 리테일러 관리, 마케팅까지 각각 별도의 조직과 비용이 필요하다.
몸집 커진 K-뷰티, 마케팅비도 수천억원대로
빠르게 성장한 K-뷰티 기업들의 비용 구조에서는 스케일업 단계에서 요구되는 자본의 크기가 드러난다.
각사 감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조선미녀 등을 운영하는 구다이글로벌은 2025년 1조4717억원대 매출을 기록한 가운데 광고선전비로 약 2243억원을 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의 약 15.2% 수준이다.
메디큐브 등을 운영하는 에이피알 역시 2025년 약 1조527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광고선전비는 약 2666억원으로 매출의 약 17.5% 수준이었다.
아누아를 운영하는 더파운더즈는 같은 해 7176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한 가운데 광고선전비로 약 1179억원을 집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출 대비 비중은 약 16.4%다.
기업별 회계 처리 방식에 따라 광고선전비와 판매촉진비 등 세부 항목에는 차이가 있으나 빠르게 성장하는 K-뷰티 기업들이 브랜드 인지도와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마케팅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화장품 산업에서 자본이 필요한 지점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자본력이 생산시설과 연구개발 역량을 확보하는 데 집중됐다면, OEM·ODM 인프라가 보편화된 현재는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노출하고 유통망을 확대하며 판매 속도를 유지하는 데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한 바이럴뿐 아니라 아마존 등 글로벌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브랜드 간 광고 경쟁도 확대되고 있다. 초기 히트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후 광고 효율과 재구매, 유통 확대를 통해 판매량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단계에서 또 다른 자본 경쟁이 시작되는 셈이다.
결국 초기 브랜드가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데 필요한 자본과 이를 수백억~수천억원대 브랜드로 키우는 데 필요한 자본 사이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OEM·ODM을 활용하면 비교적 적은 초기 투자로 브랜드를 시작할 수 있지만 성장 단계에서는 재고와 유통, 마케팅, 해외 운영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자금력과 조직력이 요구된다.
제조 산업의 역할 역시 이에 맞춰 확대되고 있다. 2025년 ODM 업체 전체 생산실적은 5조2603억원으로 전년 4조3339억원보다 약 21% 증가했다. 코스맥스가 1조6104억원, 한국콜마가 1조3012억원으로 각각 30.6%, 24.7%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ODM 산업의 성장은 새로운 브랜드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넓혔지만 동시에 제품 생산 자체를 브랜드 간 핵심 차별화 요소에서 밀어내는 효과도 낳았다. 비슷한 제조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브랜드가 늘어날수록 경쟁력은 제품을 얼마나 빨리 생산할 수 있느냐보다 어떤 제품을 시장에서 히트시키고, 그 수요를 얼마나 빠르게 확대할 수 있느냐에 가까워진다.
이에 따라 제조업체와 유통사, 플랫폼의 역할도 단순 생산과 판매에서 브랜드 성장 과정 전반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 생산 이후 마케팅과 글로벌 유통, 물류, 현지화까지 연결할 수 있는 인프라가 브랜드 성장 속도를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K-뷰티 시장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어느 때보다 쉬워졌지만 성공한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오히려 어려워졌다. 책임판매업체 증가율이 산업 성장률을 크게 웃도는 사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브랜드는 빠르게 늘었고, 시장에서 검증된 이후에는 더 큰 자본과 조직을 갖춘 기업이 성장 속도를 높이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K-뷰티의 경쟁은 새로운 브랜드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느냐보다 초기 소비자 반응을 안정적인 매출로 전환하고, 이를 다시 해외 유통과 후속 제품으로 확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낮아진 진입 장벽 뒤에 ‘스케일업’이라는 새로운 성장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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