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P-1이 패션브랜드의 사이즈곡선을 실시간으로 바꾸고 있다. 사진=ChatGPT
비만·당뇨 치료에 사용되는 GLP-1 계열 약물(위고비, 오젬픽 등)이 글로벌 패션시장의 새로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체중 감소로 옷 사이즈가 빠르게 바뀌면서 신규 의류 구매가 늘어나는 한편, 여러 사이즈를 동시에 주문했다가 반품하는 소비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기업 입장에서는 매출 확대 기회와 함께 사이즈별 재고 불일치, 반품비용, 재판매 가치 하락 등 새로운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갤럽이 올해 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미국 성인 5065명을 조사한 결과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GLP-1 계열 약물을 현재 사용하고 있다는 응답은 11%로, 2024년 3%에서 크게 높아졌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사용한 경험이 있다는 비율은 15%였다. 시장조사업체 ‘뉴메레이터(Numerator)’ 데이터에서도 올해 5월 미국 가구의 21%에 현재 GLP-1 사용자가 포함돼 있었다.
GLP-1을 통한 체중 감소는 실제 패션 지출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컨설팅 기업 PwC 조사에서 GLP-1 사용자의 73%가 의류 사이즈에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복용 6~8개월 뒤 전체 의류 지출은 이전보다 9.9% 증가했으며 여성 청바지 지출은 66.1%, 수영복 31.1%, 드레스 22.1% 늘었다. 시장조사업체 서카나(Circana) 조사에서도 GLP-1 사용자 80%가 사이즈 변화로 새 옷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고, 현재 이용자의 55%는 이미 의류나 신발을 새로 구매했다. 브래지어 시장에서는 밴드 42 이상과 D컵 판매 비중이 낮아지는 반면 밴드 40과 B·C컵 비중은 높아지는 변화도 나타났다.
문제는 체형이 한 번에 특정 사이즈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계속 변한다는 점이다. 미국 반품·역물류 기업 리턴프로(ReturnPro)가 최근 12개월 내 GLP-1을 사용한 성인 500명을 조사한 결과 71%가 체형 변화 이후 의류 구매를 늘렸고, 58%는 고가·프리미엄 의류 지출까지 확대했다. 동시에 65%는 동일 상품의 여러 사이즈를 주문한 뒤 맞지 않는 제품을 돌려보내는 ‘브래케팅’을 하고 있었다. 브래케팅 이용자의 83%는 추가 체중 감소를 예상해 일부 사이즈를 바로 반품하지 않고 보관한다고 답했다. 전체 GLP-1 사용자 중 43%는 약물 사용 이후 의류 반품 빈도가 증가했고, 48%는 구매 후 체중이 줄면서 커진 옷을 반품한 경험이 있었다.
이는 이미 반품 부담이 높은 패션산업에 추가 비용을 얹는다. 미국소매협회(NRF)는 2025년 미국 유통업계 전체 반품액을 8499억 달러, 전체 매출 대비 반품률을 15.8%로 추산했다. 온라인 판매 반품률은 19.3%였다. 별도 조사에서는 의류·신발 업체의 56%가 자사 반품률이 30% 이상이라고 응답했다. GLP-1에 따른 사이즈 변동이 온라인 패션의 구조적인 반품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오프라인 피팅룸의 가치는 다시 높아지고 있다. 리턴프로 조사에서 GLP-1 이용자의 69%는 빠른 사이즈 변화로 온라인 상품의 사이즈 선택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면서 매장에서 직접 입어보려는 경향이 높아졌다고 답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데이비드브라이덜의 켈리 쿡 CEO는 최근 6개월간 고객이 매장에서 입어보는 드레스 수가 평균 두 배로 증가했으며 일부 고객은 최대 10벌까지 시착한다고 밝혔다. 빅토리아시크릿은 일부 피팅룸에서 다른 사이즈를 요청할 수 있는 AI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체형 변동성이 커지는 환경에서 ‘핏 테크’와 피팅 서비스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추세다.
개인화 서비스도 대응 수단으로 부상했다. 스티치픽스는 체중 감량 과정의 소비자를 새로운 고객군으로 보고 개인 스타일리스트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고객이 스타일리스트에게 보내는 요청에서 ‘체중 감량’을 언급한 횟수는 최근 2년간 3배로 늘었고, 직전 분기에는 전년 동기보다 75% 증가했다. 체중이 계속 변하는 고객에게 단계별로 맞는 사이즈와 스타일을 제안하는 것이 새로운 서비스 수요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리세일과 렌털 시장도 수혜 가능성이 있다. 마케팅 에이전시 티누이티(Tinuiti)가 올해 7월 미국 의류 소비자 1000명을 조사한 결과 GLP-1으로 체중을 감량한 소비자의 40%가 향후 1년 의류 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답해 전체 소비자 평균 25%를 웃돌았다. 렌털 서비스를 이용할 의향은 GLP-1 사용자 25%, 전체 소비자 12%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최종 체중이 안정되기 전까지 새 옷을 반복 구매하기보다 렌털이나 중고거래를 이용하고, 기존에 맞지 않게 된 옷을 리세일 시장에 내놓으려는 수요가 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브랜드의 핵심 과제는 단순히 작은 사이즈 생산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재고관리지원업체 임팩트 애널리틱스(Impact Analytics)가 미국 주요 의류 유통업체의 판매·반품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2~2024년 여성 상의에서 XS·S 판매 비중이 2%포인트 증가한 반면 L·XL은 같은 폭으로 감소했다. 남성 상의에서는 M·L이 2.7%포인트 늘고 XL·XXL은 3.5%포인트 줄었다. 이 회사는 과거 사이즈곡선을 그대로 적용하면 2027년 연간 4억 개 이상의 의류가 실제 수요와 맞지 않게 배치돼 약 50억 달러의 재고·마진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다만 이는 공식 통계가 아닌 해당 기업의 데이터 모델링 전망치다.
따라서 패션기업은 시즌별 고정 사이즈 비율에 의존하기보다 지역·채널·품목별 판매속도와 반품사유를 실시간에 가깝게 분석해 사이즈곡선을 계속 보정해야 한다. 신축성과 사이즈 조절이 가능한 디자인, 유연한 교환·수선 정책, 개인화된 사이즈 추천, 반품상품의 신속한 재판매와 리세일 연계도 중요해질 전망이다. 리턴프로 조사에서 GLP-1 사용자의 58%가 유료 사이즈 교환 프로그램에 가입할 의향을 보인 것도 단순 무료 반품보다 편리한 ‘사이즈 전환 서비스’ 자체가 새로운 상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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