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본부 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TF'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재정경제부]
정부가 국가전략기술 연구개발(R&D)에 성공한 기업의 성과물을 별도의 경쟁입찰 없이 공공기관이 구매할 수 있도록 국가계약제도를 개편한다. 연간 238조원에 달하는 정부의 공공구매력을 활용해 정부가 혁신기술의 ‘첫 구매자(First Buyer)’ 역할을 맡는 방식이다.
정부는 28일 비상경제본부 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혁신기술 촉진을 위한 국가계약 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기존 국가계약의 경쟁입찰·사전규격화 원칙을 혁신기술에 한해 유예하거나 완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발·구매 연계형 ▲성과목표형 ▲시범특례(조달 샌드박스) 등 ‘3대 국가계약 혁신 트랙’을 신설한다.
R&D 성공하면 다시 입찰 안 해도 구매 가능
중소·벤처기업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개발·구매 연계형’ 계약이다.
현재는 정부 R&D와 공공구매가 서로 다른 법률과 절차에 따라 운영된다. 기술개발은 국가연구개발혁신법에 따른 협약으로 진행하고, 개발된 제품을 정부나 공공기관이 구매할 때는 국가계약법에 따라 다시 계약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에 따라 기업이 R&D에 성공해도 실제 공공시장에 제품을 공급하려면 규격 확정과 경쟁입찰 등의 절차를 다시 거쳐야 했다.
정부는 이같은 개발과 구매 간 단절을 없애기로 했다. 앞으로 개발 단계에서 공모를 통해 기업을 선정하는 등 실질적인 경쟁을 이미 거쳤다면 개발된 성과물을 구매할 때 국가계약법상 경쟁요건을 충족한 것으로 인정한다.
다만 R&D 사업을 처음 공고할 때부터 ‘개발에 성공하면 후속 구매가 가능하다’는 내용과 구매 요건·범위 등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개발 성공 기준과 구매 범위·기간을 사전에 확정하고 개발기업에 우선협상권을 부여할 방침이다. 실제 구매 물량과 단가는 구매 시점에 결정한다.
대상은 국가전략기술육성특별법상 국가전략기술을 비롯해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소재·부품·장비산업법 등에 따른 국가전략·첨단기술 분야다.
소관 부처가 신청하고 조달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개발·구매 연계 계약 권한을 부여한다.
AI로봇 개발하면 경찰·소방이 ‘첫 구매자’
정부는 AI 로봇 공공보급을 대표적인 적용 사례로 제시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R&D를 담당하고 경찰·소방청이 구매기관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개발과 구매기관을 사전에 연결한 뒤 공모를 통해 기업을 선정하고, 산업부의 R&D를 거쳐 성과물이 나오면 경찰·소방청이 사전에 약정한 물량을 구매한다.
휴머노이드나 4족 보행로봇과 같은 AI 로봇은 R&D 이후 양산을 통한 원가 절감과 실제 현장에서의 데이터 확보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공공기관이 구매하려면 경쟁입찰 등의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새 제도가 시행되면 개발 단계부터 일정 규모의 공공수요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기존 구매조건부 R&D와도 차이가 있다.
구매조건부 R&D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개발자금을 지원하지만 과제당 최대 6억원, 개발기간 2년 이내여서 대규모 공공수요와 연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혁신제품 제도 역시 상용화 직전 단계의 제품을 중심으로 수의계약이나 시범구매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새 개발·구매 연계형 계약은 기업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R&D 단계에서부터 개발 이후 구매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정해진 규격 대신 ‘성과목표’로 계약
두 번째 변화는 ‘성과목표형 경쟁적 대화방식’ 도입이다.
정부가 제품의 세부 규격이나 기술방식을 미리 정해 발주하는 대신 해결해야 할 문제와 달성할 성과를 제시하고, 기업들이 기술적인 해법을 제안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기존 공공조달이 ‘정해진 규격의 제품을 누가 싸게 공급하느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누가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할 수 있느냐’로 계약의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성과목표 설정 ▲개산계약 ▲성과연동 대가지급 ▲계약변경 ▲성실실패 인정 ▲지식재산권 공동소유 등 6가지 유연성을 도입한다.
가격을 사전에 확정하기 어려운 혁신사업은 우선 개산가격으로 계약하고 사업 이후 정산할 수 있도록 한다. 대금 역시 단순한 사업기간이나 공정률이 아니라 사전에 정한 성과목표, 즉 ‘마일스톤’ 달성 여부에 따라 나눠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사업 도중 기술환경이 달라지면 요구성능과 계약금액도 변경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기업이 신의성실 의무를 다했지만 기술적인 한계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면 매몰비용을 인정하고 행정제재를 면제하는 ‘성실실패’ 제도도 도입한다.
계약 과정에서 개발된 지식재산권은 국가와 계약기업의 공동소유를 원칙으로 한다. 개발 기여도 등에 따라 기업 등의 단독소유도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기존 계약으로 못 사는 첨단기술엔 ‘조달 샌드박스’
현행 국가계약제도로 도입하기 어려운 새로운 기술에는 ‘조달 샌드박스’를 적용한다.
현재도 국가계약법 시행령에 시범특례가 있지만 특례 적용 범위가 주로 낙찰자 결정 단계에 한정돼 있다.
정부는 이를 국가계약법상 정식 ‘조달 샌드박스’로 격상하고 적용 범위를 계약 체결과 이행·관리까지 넓힌다.
계약방법과 예정가격 작성, 낙찰자 결정뿐 아니라 계약보증금, 대가지급, 계약금액 조정, 지체상금 등에도 특례를 적용할 수 있게 한다.
특례 기간은 2년을 원칙으로 하되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 공공시장에서 안전성과 효율성이 확인된 제도는 성과평가를 거쳐 국가계약법령의 정식 제도로 전환한다.
238조 공공조달, 혁신기술 ‘테스트베드’로
이번 개편의 배경에는 빠르게 발전하는 첨단기술과 기존 국가계약제도 사이의 간극이 있다.
기존 국가계약은 구매할 제품의 규격과 가격 등을 사전에 확정한 뒤 경쟁입찰을 하는 방식이 기본이다.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아직 시장에 없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빠르게 변화하는 첨단기술을 도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가 2025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약 9%에 해당하는 연간 238조원의 공공구매력을 혁신기술의 초기시장 형성에 활용하려는 이유다.
정부는 개발·구매 연계형과 성과목표형, 조달 샌드박스의 법적 근거를 담은 국가계약법 개정안을 오는 9월 마련·발의할 계획이다.
법안 통과에 대비해 시행령과 계약예규 등 하위법령도 정비한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2027년부터 조달청에 지원단을 두고 적용 가능한 사업을 발굴할 계획이다.
“국가계약제도 개편”...인구감소지역·비수도권 기업 ‘우선 낙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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