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업계의 이중 공급망 전략이 확대되고 있지만 실제 이전 속도는 더디다는 분석이다. 사진=게티이미지
글로벌 패션업계의 니어쇼어링이 일시적 공급망 대응책을 넘어 상시 조달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국·베트남·방글라데시 등에서는 대량의 기본상품을 생산하고, 수요 변동이 크거나 신속한 추가 발주가 필요한 물량은 소비시장과 가까운 지역에서 공급하는 ‘이중 조달’ 구조가 확산되는 모습이다.
니어쇼어링이 부상하는 가장 큰 배경은 생산단가보다 속도와 재고 위험 관리다. 장거리 해상운송을 전제로 한 아시아 생산은 대량생산에서 여전히 경쟁력이 높지만 리드타임이 길고 지정학·물류 리스크에 노출된다. 반면 근거리 생산은 초기 발주를 줄인 뒤 판매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기 제품을 빠르게 추가 투입하는 ‘리드 앤 리액트’ 방식에 적합하다. 패션기업의 조달 기준도 최저가격 중심에서 시장 출시 속도, 재고 회전, 공급망 유연성까지 확대되고 있다.
미국, 非아시아 조달 늘었지만 생산 이전은 제한적
미국에서는 멕시코와 과테말라·엘살바도르·온두라스 등 중미 지역이 핵심 후보지다. 지난 7월 미국패션산업협회(USFIA) 발표에 따르면 조사 대상 미국 패션기업이 의류를 조달하는 국가는 2025년 46개에서 올해 49개로 늘었다. 대기업의 약 65%는 10개국 이상을 이용했다. 동시에 아시아가 여전히 최대 생산권역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베트남·방글라데시 의존도는 낮아지고 과테말라·이집트·요르단 등 비아시아 지역 활용은 확대됐다.
특히 조사기업의 76%가 올해 미국·도미니카공화국·중미 자유무역협정(CAFTA-DR) 회원국에서 의류를 조달했다고 답해 2025년 64%보다 높아졌다. 24%는 전체 의류 조달의 10% 이상을 이 지역에 배정했다. 주요 생산지는 과테말라·엘살바도르·온두라스다. 반면 USMCA 지역 조달은 주로 멕시코를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올해 큰 폭으로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제 생산 이전 속도는 기대보다 느리다. USFIA와 공급망 품질관리업체 QIMA의 조사에서도 니어쇼어링 확대 계획과 실제 발주 규모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확인된다. 가장 큰 제약은 생산능력과 원부자재 공급, 가격경쟁력, 원산지 규정이다. 서반구 생산기지는 시장 접근성과 속도에서는 강점이 있지만 아시아에 비해 소재 공급망과 품목 다양성이 제한적이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멕시코나 중미에서 봉제하면 곧바로 무관세’라는 접근도 경계해야 한다. USMCA와 CAFTA-DR의 섬유·의류 특혜관세에는 원사를 역내에서 생산해야 하는 ‘얀 포워드(yarn-forward)’ 등 복잡한 원산지 규정이 적용된다. 2026년 미국의 추가 통상조치까지 더해지면서 지리적 근접성만으로 관세 우위를 확보하기도 어려워졌다.
유럽은 튀르키예·포르투갈·북아프리카가 핵심 축
유럽에서는 튀르키예와 포르투갈, 모로코·튀니지 등 지중해권이 대표적인 니어쇼어링 생산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튀르키예는 원사·직물부터 염색·봉제까지 비교적 수직계열화된 생산기반과 유럽시장 접근성을 동시에 갖췄다는 점이 강점이다. EU와 튀르키예의 상품 교역액은 2025년 2176억 유로를 넘어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튀르키예 수출의 42.7%가 EU로 향했다. EU-튀르키예 관세동맹을 통한 오랜 산업 연계도 근거리 조달의 기반이다.
북아프리카 역시 단순 저임금 생산기지를 넘어 유럽 의류 공급망의 일부로 편입돼 있다. EU의 2025년 튀니지산 수입액 134억 유로 가운데 섬유류는 25억 유로로 18.9%를 차지했다. EU와 튀니지 간 산업재 교역은 자유무역 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범유럽·지중해 원산지 누적 시스템도 역내 소재와 봉제산업의 연계를 지원한다.
실제 패션기업의 생산모델에서도 근거리 조달은 이미 상당 부분 정착했다. 인디텍스는 현재 최종제품 생산업체의 상당 부분을 본사가 있는 스페인과 가까운 스페인·포르투갈·튀르키예·모로코 등에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회사는 짧은 생산 로트와 근거리 생산을 결합해 시즌 중 수요 변화에 대응하는 구조를 운영한다. 이는 니어쇼어링이 전체 생산을 본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보다 트렌드 상품과 추가 발주 물량을 빠르게 공급하기 위한 생산 포트폴리오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의 환경규제 강화도 공급지역 선정 기준을 바꾸고 있다. 섬유·의류는 EU의 에코디자인 규정(ESPR) 2025~2030 작업계획에서 우선 품목군으로 지정돼 향후 디지털제품여권(DPP) 도입 대상이 될 예정이다. 개정 폐기물기본지침에 따른 섬유 생산자책임확대(EPR)와 미판매 의류·신발 폐기 제한도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생산지 이동’보다 ‘발주 구조 변화’ 주목해야
이에 따라 니어쇼어링은 ‘탈아시아’보다 공급망 다변화에 가깝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생산기지는 비용, 대량생산, 소량주문 대응력, 수직계열화 측면에서 여전히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유럽·미주 인접 생산지는 빠른 추가생산과 재고 대응에 강점을 가진다. 결국 패션기업들은 대량 기본상품은 아시아에서, 트렌드 상품과 긴급 추가물량은 근거리에서 조달하는 구조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섬유업계도 완제품 생산기지 이동 자체보다 소재 발주처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튀르키예·북아프리카·멕시코·중미 등 새로운 봉제 거점과 연결되는 소재 공급망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주에서는 품목별 원산지 규정을 충족할 수 있는 현지 생산·합작 전략을 검토해야 한다. 앞으로 글로벌 패션 공급망의 경쟁력은 ‘가장 싼 생산지’를 찾는 데서보다 아시아와 근거리 생산망을 얼마나 빠르고 유연하게 연결하느냐에서 갈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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