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시장에서 '소수자 지지'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반열에 올랐다.
2018년 방탄소년단(BTS)이 글로벌 시장의 정점에 올라선 배경에는 '소외된 이들'을 향한 지지와 연대가 있었다. 데뷔 초기 한국 사회의 구조적 압박(취업난, 입시 경쟁, 수저론) 속 청춘의 불안을 대변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국경을 넘어 해외의 이민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고스란히 닿았다. 전 세계의 ‘아웃사이더’들과 맺은 좁고도 깊은 유대는 곧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의 글로벌 연대로 확장됐다.
이러한 패러다임 시프트는 오늘날 글로벌 비즈니스 시장, 특히 뷰티 산업에서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고 있다. 다인종·다문화가 일상인 해외 시장에서 소수자 지지는 이제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이 아니다. 시장 진입을 위한 '기본 인프라'에 가깝다. 매년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Pride Month)’이 되면 글로벌 뷰티 브랜드들이 무지개색 패키지의 한정판을 출시하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적 양식이다. 이 시기 침묵하는 브랜드는 글로벌 고관여 소비자들에게 ‘시대착오적’이거나 ‘포용성이 결여된’ 브랜드로 낙인찍힌다.
환우들을 위해 제작된 레어뷰티 머메이드 라인 중 컨투어 제품.
'펜티 효과'부터 '레어 뷰티'까지, 산업의 표준이 된 다양성
소수자의 결핍을 채워 산업의 표준을 바꾼 대표적 사례가 바로 리한나의 ‘펜티 뷰티(Fenty Beauty)’다. 기존 메이크업 시장에서 소외되었던 극단적으로 밝거나 어두운 유색인종 스킨 톤을 모두 아우르는 50가지 이상의 파운데이션 쉐이드를 출시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알비노 환자와 흑인 소비자들의 열광 속에 출시 40일 만에 1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뷰티 업계 전체가 다품종 쉐이드를 의무적으로 출시하게 만든, 이른바 ‘펜티 효과(Fenty Effect)’의 서막이었다.
국내 브랜드 ‘티르티르(TIRTIR)’ 역시 날카로운 타깃팅의 유효성을 증명하며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티르티르는 미국 진출 초기 현지 흑인 뷰티 크리에이터에게 쉐이드 구성에 대한 비판적이고 공개적인 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비판을 회피하는 대신 기회로 삼았다. 유색인종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적극 수용해 K뷰티 최초로 45개 이상의 쉐이드로 제품군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폭넓은 쉐이드와 K뷰티의 독보적인 밀착 기술력이 만나자 자발적인 틱톡 바이럴이 일었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미국 아마존 전체 뷰티 카테고리 1위라는 대기록으로 이어졌다.
맥 비바 글램 시리즈.
전통적 미의 기준을 부수는 시도는 제품의 외형마저 바꾸고 있다.
바이레도(Byredo)는 첫 메이크업 라인을 론칭하며 "결점을 가리는 수단이 아닌 예술적 자기표현의 도구"라는 메시지와 함께 퀴어, 드랙퀸 모델을 전면에 내세웠다. 셀레나 고메즈의 ‘레어 뷰티(Rare Beauty)’는 더 나아가 지체 소수자의 삶을 파고들었다. 루푸스병과 우울증을 앓는 고메즈는 자신의 병과 삶의 고충을 고백하며, 악력이 약한 환자들도 쉽게 돌려 열 수 있는 동그란 볼 형태의 캡을 제작했다. 소수자의 구체적인 불편함을 해결한 이 제품은 출시 첫해에만 7000만 달러(한화 약 9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공고한 팬덤을 형성했다.
해외에서 먼저 출발해 글로벌 시장에서 급성장 중인 브랜드 ‘예쁘다(Yepoda)’ 역시 이러한 연대의 흐름을 브랜드의 메시지에 담았다. 이들은 매년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이 되면 자사의 베스트셀러 상품의 ‘한정판 프라이드 에디션’을 출시하고, 수익금의 전부를 관련 인권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지속해오고 있다.
2018년 3CE는 매니큐어 화보로 블랙페이스 논란에 휩싸인 뒤 해당 이미지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철학 없는 ‘시늉과 연출’의 부작용
그러나 진정성이 결여된 '소수자 마케팅'은 양날의 검이다. 영국의 부후 뷰티(Boohoo Beauty)는 모든 사이즈를 지지한다는 슬로건과 달리 실제 상품은 구색 맞추기 식의 구성을 선보여 거센 비판을 받았다.
국내 브랜드 스타일난다의 화장품 브랜드 3CE는 2018년 공개한 화보로 문화적 감수성 논란에 휩싸였다. 매니큐어 발색을 보여주기 위해 두 모델이 손을 맞잡은 이미지에서 흑인으로 표현된 모델의 손바닥까지 검게 칠해진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흑인의 손바닥은 멜라닌 색소가 상대적으로 적어 피부색이 밝게 나타난다. 이후 실제 흑인 모델을 섭외한 것이 아니라 백인 모델의 손에 검은색 메이크업을 칠해 인종적 특징을 연출한 정황이 알려지면서 비판은 더욱 확산됐다. 해외 소비자들은 해당 표현을 인종주의적 모욕으로 인식되는 ‘블랙페이스’의 변형으로 받아들였다.
논란이 커지자 브랜드는 해당 화보를 삭제하고 다국어 사과문을 게재했다. 이 사례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문화적·인종적 맥락에 대한 검토가 부족할 경우 브랜드 이미지와 신뢰가 크게 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티르티르의 다양한 쉐이드 구성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겠다'는 태도
소외되던 이들을 지지하는 순간, 브랜드와 소비자 사이에는 견고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소수를 향한 브랜드의 철학은 그 소수에 속하지 않는 일반 대중의 마음도 움직인다.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더 나은 가치를 지지한다는 자부심을 주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된 지금, 소수자 서사는 정량적 비교를 넘어선 강력한 정성적 무기가 된다.
'모두에게 사랑받되,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겠다'는 국내 브랜드들의 보수적인 대중 마케팅 공식은 글로벌 시장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 안착하여 체급을 키워가고 있는 K뷰티 브랜드들은 머지않아 필연적인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는 소수자와 다양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에 어떻게 동참하고 있는가’라는 날선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이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 앞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회피와 침묵이다. 리스크 뒤로 숨는 대신, 브랜드가 세상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영리하고 진정성 있는 해답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다만 단순히 당위성만으로 뛰어드는 것은 금물이다. 현재 소비자의 안목은 고도로 진화했다. 철학이 결여된 어설픈 서사나 시늉에 그치는 마케팅은 거센 역풍을 부를 뿐이다.
현지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저한 제품력이 담보되어야 한다. 대중이라는 모호한 다수를 향해 넓은 그물만 던지는 구시대적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흐름을 보장할 수 없다. 소수의 구체적인 삶과 결핍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들의 갈증을 제품으로 해결해 주는 브랜드만이, 역설적으로 가장 거대하고 공고한 주류의 팬덤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Tag#티르티르#소수의 연대#BTS#산업의 표준이 된 다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