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구 아이엘국제물류 회장이 본지 여의도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이재구 이이엘국제물류유한공사 회장의 중국 진출은 흔히 말하는 ‘치밀한 전략’이나 ‘준비된 성공’의 결과가 아니다. 막막함과 실수, 방향을 잃고 헤매던 시간들 속에서 피어난 서사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우왕좌왕의 과정이 그를 물류의 길로 이끌었다. 처음 그는 장사를 하러 중국에 갔지만, 결국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현재 중국에 16개 지점을 비롯한 베트남,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등 전세계에 걸쳐 18여 개국에 56개 지사를 거느린 국제물류회사로 성장했다.
1988년, 이재구 회장은 홍콩을 거쳐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본래 목적지는 아프리카 시장 개척이었지만, 지인의 권유로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직접 한번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일본 의류 시장은 값싼 중국산 제품에 빠르게 잠식되고 있었고, 그는 경쟁을 피하기보다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북경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계획은 어긋났다.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어 한마디 하지 못하던 그는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 홀로 남겨졌다.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는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냥 ‘와버렸다’는 생각뿐이었죠. 여기서 도망치면 평생 중국은 못 올 것 같았습니다.”
호텔 방에서 시작된 생존 전략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를 찾아 북경 시내로 들어오던 중 우연히 도로 옆에 한문으로 조선냉면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발견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것이라도 판단하고 무작정 택시를 세워 들어간 그곳에서 조선족 청년을 만났고, 통역을 부탁하며 중국에서의 첫 인연을 만들었다. 인근에 호텔을 잡은 뒤 이 회장은 ‘중국에서 사업 파트너를 찾는다’는 명함 크기의 광고를 인민일보에 냈다.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기라 중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광고가 실리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텔로 찾아왔다. 그는 좁은 호텔 방에서 하루에도 수차례 상담을 하며 중국인들의 말투와 태도, 흥정 방식, 약속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혀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장사를 했다기보다, 중국 사람들과 인연을 만들고 중국 사회를 공부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중국에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업보다 더 큰 문제는 생활이었다. 언어도, 제도도,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다.
“이 나라에서 나는 뭘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선 그가 선택한 해답은 중국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 현지 가정에 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중학생 딸이 있는 집에서 9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매일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집 가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담배를 피우면서 밥을 하더군요. 처음엔 솔직히 이해가 안 됐죠.”
그 낯설음은 중국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됐다. 그는 중국어뿐 아니라 대만식 번체자까지 익혔다. ‘판티지(繁體字)’라는 개념도 이때 처음 알았다. 말과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생활 리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책으로 배웠다면 절대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에서 최초로 물류와 유통, IT를 접목한 첨단 유통단지.
1989년부터 1993년까지 그는 북경 왕푸징 백화점에서 ‘한미시장점’을 합작 운영했다. 대박을 친 사업은 아니었지만,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상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현장에서 확인한 시간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그의 시야는 더 멀리 확장됐다. 이 시기 그는 단순한 판매를 넘어 유통, 통관, 운송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훗날 물류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나라는 빨리 돈 벌 곳이 아니라, 오래 버텨야 할 곳이라고...”
당시 중국인들은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하기 어려우니 그들이 하기 어려운 국제물류 사업을 해야 겠다고 사업종목을 결정하게 되었고 앞으로 “중국이 발전하면 물류 사업도 같이 발전하게 될것이다” 라는 판단 아래 “중국을 기점으로 주변 18개국을 물류네트웍크로 구축하여 여기에 종주가 되자” 사업목표를 설정하고 지금까지 30여년을 버티면서 노력해 왔다.
이후 천진 탕고 국제터미널, 대련미식왕, 심양북역, 중가백화점, 하얼빈국제지하상가 등지에 한국상품 도매시장을 열었고, 여기에 다수의 한국인 상인을 적극 유치하여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IMF, 그리고 ‘물건보다 길’이라는 깨달음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가 멈춰 선 자리에서 다른 방향을 봤다. 부도난 한국 의류업체들이 헐값에 내놓은 재고를 대량으로 매입해 중국으로 보냈다. 이미 중국 내 판매망을 갖춘 그는 이를 정상가에 판매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그때 확실히 느꼈습니다. 물건보다 중요한 게 길이라는 걸요.”
그는 80여 명의 보따리 무역상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인천을 기점으로 위해, 연태, 천진, 대련, 청도, 단동 등으로 이어지는 물류 흐름을 만들었다. 장사가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사업이 되는 순간이었다.
2002년 4월 19일 그는 사업 거점을 광주(广州)로 옮겼다. 그러나 광주에서 한국까지의 물류 환경은 열악했다. 운송에는 20일 이상이 걸렸고, 항공편은 홍콩을 경유해야 했다. 그는 직접 해법을 만들었다. 철도-트럭-선박을 연계한 복합운송 노선을 설계했고, 중국 우정국의 특급열차를 활용해 운송 기간을 5일로 단축했다.
이로서 처음으로 5일운송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2002년 6월,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운행되는 복합 ‘5일운송’이라는 노선을 개통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아시아나 항공 예약률이 20%에서 80%로 급증하며, 한국과 중국을 잇는 물류 네트워크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그때는 그걸 오로지 나밖에 할 수 없었어요. 중국인도 못 했습니다. 특급 우체국 라인을 빌린다는 건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이재구 회장이 여의도 본지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비즈니스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이 회장은 사업의 본질에 대해 무엇보다 ‘선(線)을 지키는 태도’를 강조한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선을 넘게 되는데, 그 시작은 늘 사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을 한 번 넘는 순간, 사업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가 특히 이 원칙을 강조하는 이유는 물류업의 특성 때문이다. 물류는 남의 물건을 운반해 주는 일이다. 운송업자는 상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전달돼야 하는지, 언제까지 도착해야 하는지를 모두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정보와 통제권을 동시에 쥔 위치에 있다. 이 구조 속에서는 유혹이 끊임없이 생긴다.
운송 중인 상품을 먼저 유통시켜 팔 수도 있고, 짝퉁을 섞어 보내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납기를 알면서 일부러 하루 늦춰 보내고 다음 날 물량과 묶어 처리하면 비용을 줄일 수도 있다. 숫자로만 보면 모두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런 선택이 결국 사업의 목을 조른다고 단언한다.
“그렇게 해서 과연 다음에도 물건을 맡길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 번은 돈이 될지 몰라도, 결국 내가 내 새끼 잡아먹는 꼴이 됩니다. 물류의 본질은 효율이 아니라 상도(商道)가 아닐까요.”
이런 철학은 직원 교육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직원들 책상 위에 한 문장을 중국어로 번역해 붙여 두었다.
“상품은 컨테이너나 운송하는 길 위에 있으면 안 된다. 상품은 고객의 쇼윈도에서 손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 문장은 물류업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한다. 물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품의 주인은 고객이고, 물류는 그 상품이 제자리에 도착하도록 조용히 돕는 통로일 뿐이다. 중간에서 욕심을 부리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실패가 사업의 인프라가 되다
이재구 회장은 자신의 성공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많이 헤맸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오로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을 뿐”이라고 밝혔다. 우왕좌왕하던 한 한국 사업가는 그렇게 중국에서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은 오늘날 수천 개 기업이 오가는 한중 물류의 통로가 됐다.
“중국에서 배운 건 하나입니다. 결국 사업은 사람이고, 약속입니다.” 그의 말에는 30년 중국 현장을 버텨온 사람만의 무게와 함께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집념이 묻어났다.
이재구 회장은 자신의 물류 철학을 설명할 때 종종 두 인물을 떠올린다. 한 명은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한 장보고, 다른 한 명은 초원을 넘어 대륙을 연결한 징기스칸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직접 지배하기보다 길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장보고는 군사력보다 해상 네트워크와 신뢰로 바다를 장악했고, 징기스칸 역시 정복자였지만 진짜 힘은 이동과 연결의 질서를 만든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물류 사업을 이 두 리더십의 연장선에서 이해한다.
“물류는 지배가 아닙니다. 연결입니다. 길을 쥔 사람이 시장을 움직이지만, 길을 막으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배운 리더십 역시 명령형이 아니었다. 사람을 누르기보다 흐름을 이해하고 먼저 움직이는 리더십이었다. 이재구 회장은 오늘도 물류를 움직인다. 눈에 띄지 않지만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추는 길, 그 길 위에는 여전히 개척자의 리더십이 흐르고 있다.
이재구 회장(사진 맨 오른쪽)은 2017년 장보고한상 수상자이다. 사진은 제2회 장보고최경주배 골프대회에 참석, 역대 장보고 수상자들인 박종범 월드옥타 회장(왼쪽에서 네번째)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

이재구 회장이 재중대한체육회 선수단장으로 전국체전에 참가해, 해외 부문 준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모습.
징기스칸과 장보고는 시대도, 방식도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길을 만든 사람만이 역사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간 이재구 회장은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중국인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이웃으로 친구로 자리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고 그것을 증명하듯 사업경력 30년이 넘는 기간 중국의 사업 구성원으로 또한 파트너로 자기가 맡은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학자금 대출제도, 청년 신불자 만든다
그는 중국 사회를 두고 “자기 울타리 안의 일에는 극도로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의 공공이나 관계의 지속성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고 평가한다. 강한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는 단기 이익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세제 역시 이런 문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에는 양도세나 증여세가 없고, 베트남 역시 상속세율 4% 도입을 시도했다가 국민 반발로 세율을 2%로 낮췄다. 그는 상속세나 증여세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500년 1000년 장수 기업이 나오기 어렵다고 본다. 현재로 세제가 유지될 경우 삼성과 현대차그룹처럼 3세 경영이 4세, 5세로 이어지기 어려울 수 있다는 그의 분석이다.
전문경영인 체제에 대해서도 그는 신중하다. 전문경영인은 분명 효율적이지만, 임기 안의 성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을 오래 끌고 가는 힘은 결국 주인의식에서 나온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과 청년 정책, 특히 학자금 대출 제도에 대해 강한 우려를 제기했다. 대학생들이 수천만 원의 빚을 지고 사회에 나와, 졸업과 동시에 상환 부담에 짓눌리는 구조는 청년들의 미래를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회 초년생들은 학창시절의 대출금 부담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일용직을 전전하다보니 신용불량자 신세가 됩니다. 결국 이들이 최근 사회문제가 된 태국이나 미얀마, 캄보디아로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는 대학 진학이 유일한 해답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학비가 부담된다면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충분히 취업하고 자립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학이 과잉 공급된 상황에서 학생 수를 채우기 위해 동남아까지 찾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2025년 중국전자상거래협회 선정 우수기업 18개업체에게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이재구 회장(사진 왼쪽에서 6번째)이 수상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 이재구 회장은 중국 절강성 전자상거래업체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장의 개인사 역시 이런 생각과 맞닿아 있다. 그는 시골 출신으로, 대학 진학은 애초에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고등학교 시절 보일러, 가스, 냉동기, 위험물 관리 등 5~6개의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당시에는 자격증을 기업체나 현장에 빌려주면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돈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북악터널 인근의 허름한 호텔 방갈로에서 생활하면서 기술학원 조교를 했다. 종종 강사가 빠지면 대타 강의를 하기도 했던 그는 여기서 기술 하나로 버티는 법을 배웠다.
그 인연으로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병역특례 혜택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업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술로 자립하고, 빚에 쫓기지 않으면 눈앞의 이익 때문에 선을 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빠르게 크는 사업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는 사업이며, 그 힘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