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선 리즈마재단 회장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
“선거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난 2010년, 뉴욕 한인회장 선거 출마를 앞둔 김민선 리즈마재단 회장은 시아버지였던 고(故)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당시 뉴욕 한인사회는 상징적 공간인 한인회관이 매각 위기에 놓이며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김 회장은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며 선거판에 뛰어들었고, 이후 수년간의 법적 공방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뉴욕 한인회관을 지켜냈다.
지난 5월 1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난 김 회장은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마다 시아버님과의 약속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한 시간”으로 기억했다. 두 차례 소송 과정에서 200만 달러가 넘는 변호사 비용이 들어갔고 각종 협박도 이어졌지만, 끝내 한인회관을 되찾아냈다. 세금 체납으로 경매에 넘어간 한인회관을 다시 확보했고, 한때 중동계 부동산 투자회사에 급매로 넘어갔던 건물 역시 되찾았다.
뉴욕 동포사회가 150만 달러에 마련했던 한인회관은 현재 시세가 7000만 달러를 넘는 자산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그 건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뉴욕 동포사회의 역사와 자존심”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의 존재는 단순한 가족 이상의 의미였다. 그는 “시아버님은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다”며 “영어는 물론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일본어까지 직접 이메일을 처리할 정도로 철저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여성도 능력이 있으면 사회에 나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그 영향이 제 삶에 굉장히 컸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뉴욕 한인회장 재임 시절 여러 굵직한 일을 추진하며 강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동부 최초의 평화의 소녀상 설치다. 그는 한국에서 제작한 소녀상을 미국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일본 극우 세력의 조직적 반대에 부딪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소녀상은 뉴욕 JFK공항에서 반입이 막히는 상황까지 갔다.
그는 당시 뉴욕 지역 연방 하원의원이던 Carolyn Maloney 의원을 찾아가 “이 문제는 외교 갈등이 아니라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기억하자는 것”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미국 교통당국의 협조를 받아 반입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갈등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미국인들이 소녀상의 의미를 접해야 한다고 판단해 미 연방의사당 전시까지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 극우 세력의 로비로 전시가 세 차례나 무산됐다. 네 번째 시도에서도 전시 하루 전 취소 통보를 받았다.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워싱턴 D.C. 의회 지도부를 찾아가 ‘여성 인권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이 나라에 사는 당신들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항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연방 하원의장이던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의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내일 전시를 진행하라”고 했고, 결국 연방의사당 소녀상 전시는 성사됐다.
최근 김 회장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력을 추가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최초의 아시안계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선임됐다.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는 백악관의 역사와 유물, 인테리어, 대통령 기록 등을 관리·보존하는 조직이다. 1961년 Jacqueline Kennedy Onassis 여사가 설립한 단체로, 기업과 개인 후원을 통해 백악관의 역사적 가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 회장은 “백악관은 특정 대통령 개인의 집이 아니라 미국 시민 모두의 공간인 ‘피플스 하우스(People’s House)’”라며 “다문화 국가인 미국에서 소수 인종의 목소리도 반영돼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선임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약 10개월간의 인터뷰와 검증 과정을 거쳐 자문위원에 임명됐다.
그는 이번 선임이 개인의 명예를 넘어 한인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 회장은 “많은 한인들이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정치권뿐 아니라 역사·문화·교육·정책 자문 등 미국 사회 곳곳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며 “존재감을 보여줘야 정치권도 관심을 갖고 우리 목소리도 반영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한인사회의 가장 큰 과제로 ‘참여 부족’을 꼽았다. 과거 이민 1세대 시절에는 언어 장벽 탓에 교회와 한인회가 공동체 중심 역할을 했지만, 2세·3세 시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이제 젊은 세대는 영어가 자유롭고 미국 사회에 직접 진출한다”며 “한인회가 필요 없어졌다기보다, 동포들이 공동체에 관심을 덜 갖게 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권리를 주장하려면 책임도 따라야 한다”며 “우리가 먼저 사회 참여를 해야 존재감도 생기고 정치적 영향력도 커진다”고 말했다.
92년 LA폭동으로 한인사회 패러다임 변화
그는 특히 1992 LA 폭동 이후 미주 한인사회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돈을 벌고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의 전부였다면, LA폭동을 계기로 정치적·사회적 발언권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당시 누구 하나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해주지 못했다”며 “과거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한국 지방자치단체와 동포사회를 연결하는 역할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장보고한상 세계대회 당시 경제엑스포를 함께 열어 전남 완도 지역 상인들과 미국 식품업계를 연결했다. 하루 동안 체결된 업무협약(MOU) 규모만 1750만 달러에 달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최근 완도군 명예군민증도 받았다. 김 회장은 “동포사회가 단순한 친목 조직을 넘어 한국 지역사회와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선 회장이 지난 4월30일 열린 백악관 역사자문위원 정기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김민선 회장 제공]
그가 현재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는 미주한인이민사 박물관 건립이다. 그는 “성공담만으로는 이민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며 “차별과 희생, 고통을 견디며 살아온 선배들의 삶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뉴욕 한인회 건물 내부 공간을 활용해 작은 박물관 형태로 시작했다. 이후 한인과 외국인 관람객들이 늘어나면서 독립 건물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결국 퀸스 플러싱 지역에 별도 건물을 마련했다. 이곳은 과거 뉴욕 최초의 한인 의료기관으로 사용됐던 공간이다.
현재는 7층 규모 증축 공사가 진행 중이며, 내년 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 회장은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교육 공간이어야 한다”며 “후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알아야 미국 사회 안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원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육자였던 그는 지금도 교육을 삶의 중심 가치로 꼽는다. 4살 때부터 음악을 시작해 이화여자대학교 관현악과와 줄리어드 음대에서 공부한 그는 1992년부터 롱아일랜드 컨서버토리를 운영하며 예술 인재 양성에 힘써왔다. 또한 리즈마재단을 통해 국제 음악 콩쿠르를 운영하며 세계 각국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교육은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살아온 가치”라며 “할아버지가 학교를 세웠듯 저 역시 미국에서 제 나름의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온 여성 리더로서 그는 “항상 외롭고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저는 늘 한인과 아시안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했다”며 “첫 아시안, 첫 한인이라는 기록은 개인 타이틀이 아니라 후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누군가 제 길을 따라올 때는 저보다 덜 외롭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후배 세대에게 새로운 길 하나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키워드#뉴욕한인회 #김민선 회장 #김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