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외동포청이 지난해 사할린에서 개최한 영주귀국 관련 설명회 장면.[재외동포청]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강제징용됐다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영주귀국한 동포 2세대들이 ‘빈곤의 덫’에 갇혔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정부의 정책전환이 요구된다.
지구촌동포연대(KIN)는 최근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정착지원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사할린동포 정책을 ‘시혜적 복지’가 아닌 ‘권리 기반 정착’(Rights-based Settlement)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보고서는 지난해 말 수도권과 경남 양산 등 10개 지역 17개 정착촌에 거주하는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23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포커스그룹인터뷰(FGI), 전문가 자문을 토대로 작성됐다.
이번 보고서는 최근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사망한 사할린동포의 배우자와 자녀, 자녀의 배우자까지 영주귀국 대상이 확대되는 전환점을 맞은 가운데 발표돼 눈길을 끈다. 제도 확대가 실질적 ‘정착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책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귀국은 끝이 아니라 시작”… 세대교체 현실화
6일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특별법 시행 이후 영주귀국 대상자의 인구 구조는 급격히 변화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전 출생한 1세대는 전체의 10% 미만으로 줄어든 반면, 1961년 이후 출생한 2세대가 과반을 차지하는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
설문 응답자의 51.9%는 60~70대, 13% 이상은 40~50대로 나타나 세대교체가 이미 현실화됐음을 보여준다. 응답자의 53.2%는 대졸 이상 학력으로, 러시아 현지에서 전문직·사무직·자영업에 종사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2세대들의 영주귀국 이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정착 초기 가장 큰 어려움으로 응답자의 77.9%가 ‘언어 문제’를 꼽았다. 이어 필요한 정보를 찾기 어려움(36.8%), 생활문화 적응(26%), 행정절차 처리(18.2%) 등의 순이었다.
언어 장벽은 곧 정보 접근권의 차단으로 이어졌다. 병원 이용, 주민등록 등 행정 절차, 취업 정보 탐색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고령의 1세 동포가 통역과 행정 안내를 도맡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고학력이면서 경제활동 가능 인구가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단순 노무직이나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현재의 지원 체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사할린 동포 2~3세들이 영주귀국한 조부모와 부모를 만나기 위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장면.[재외동포청]
‘현재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정책은 임대주택 제공과 기초생활수급 중심의 생계 지원에 집중돼 있다. 이는 고령 1세대의 ‘요양·돌봄’에는 일정 부분 부합하지만, 경제활동이 가능한 2세대의 욕구와는 괴리가 크다는 것이 보고서의 분석이다.
특히 기초생활수급 제도는 ‘빈곤의 덫’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소득이 발생하면 급여가 삭감되거나 탈락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일부는 취업을 포기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에 의존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2세대들은 가장 시급한 개선 분야로 주거 안정 지원(26.4%), 안정적 소득 지원 및 일자리(15.2%)를 꼽았다. 부모 돌봄을 위해 귀국했음에도 가족이 서로 다른 단지에 배정돼 분리 거주하는 문제도 반복적으로 토로하는 불만이다.
“복지가 아니라 배상”…권리 기반 정착으로
보고서는 사할린동포 정책의 본질을 ‘복지’가 아니라 ‘피해 구제와 권리 회복’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등으로 사할린에 이주한 한인들이 냉전과 외교 공백 속에 장기간 방치된 역사적 책임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2·3세대의 빈곤과 사회적 고립 역시 과거 국가 책임 방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주거와 돌봄, 사회보장, 법적 지위를 포괄하는 원스톱 정착지원 체계 구축 ▲단기·중장기 정책 로드맵 수립 ▲안정적 예산 확보 ▲성과관리 시스템 마련 등을 제안했다.
또한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피해자 범위를 구분하는 현행 체계의 한계를 지적하며 “피해자 가족 역시 원상회복의 권리를 가진 주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상확대가 곧 정착 성공 아냐”...법 개정, 시작일 뿐
최근 특별법 개정으로 사망한 사할린동포의 배우자와 자녀도 영주귀국 대상에 포함되면서 제도적 진전은 이뤄졌다. 그러나 보고서는 “대상 확대가 곧 정착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경고한다.
영주귀국이 확대될수록 2세대, 3세대의 유입 증가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대한 선제적 준비가 없다면, 빈곤과 고립의 구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서는 주장했다.
KIN 관계자는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 정책은 이제 ‘요양 보호’ 단계를 넘어 ‘권리 기반 정착’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귀환 동포를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체계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사할린에서 열린 영주귀국 동포 정착 및 생활안정 지원 설명회 개최 장면. [재외동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