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교가 ODA사업으로 끌어 추진하려던 캄보디아 '메콩 평화공원 프로젝트' 후보지로 알려진 프놈펜 외곽 골든 아일랜드(꺼 미어). 섬 입구에는 훈 마넷 총리부부의 사진이 걸려져 있다. [박정연 재외기자]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와 통일교재단의 이권 개입 의혹으로 ‘게이트’ 논란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였던 캄보디아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이 내년도에 대폭 삭감된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민간협력전대차관(전대차관)’ 예산은 전액 삭감돼, 사실상 해당 사업은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전대차관은 한국 정부가 개발도상국에 자금을 지원할 때, 민간 금융기관을 거쳐 간접적으로 자금을 집행하는 형태의 차관으로, 현지 사업 집행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의 역할을 연결하는 구조를 가진다. 무분별하게 늘어난 ‘깜깜이 예산’에 뒤늦게 제동이 걸린 셈이지만, 현지 교민 사회에서는 이번 급격한 원조 축소가 캄보디아 정부에 대한 한국의 외교적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의혹투성이’ 전대차관, 결국 0원 처리
나라살림연구소와 정부 예산안 분석 결과, 2026년도 캄보디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예산은 1516억 원으로 편성됐다. 이는 올해(2025년) 3821억 원 대비 60% 이상 급감한 규모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전대차관의 ‘0원’ 처리다. 전대차관은 수원국의 현지 금융기관을 거쳐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원조 공여국이 자금의 최종 수혜자와 집행 과정을 검증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맹점을 안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캄보디아 대상 전대차관 규모는 기존 대비 20배 이상 폭증하며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 과정에서 통일교 측이 김건희 여사와 건진법사 전성배 씨를 통해 사업 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현재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이다.
범죄 수사 요청할 ‘명분’ 사라질까… 교민 사회 ‘신중론’
국내에서는 캄보디아 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납치·감금·사망 사건 등)가 잇따르자 “세금 낭비를 멈추라”, “퍼주기식 외교를 중단하라”는 여론이 거세다. 그러나 현지 교민들의 시각은 다소 다르다. ODA 중단이 당장 교민들의 안전이나 재산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캄보디아 당국의 협조를 이끌어낼 ‘외교적 명분’이 약화될 수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대한민국의 위상과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명규 캄보디아 한인회장은 “예산이 줄어든다고 해서 당장 교민들이 불이익을 받거나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만, 캄보디아 현지 경찰이나 정부 기관에 신속한 수사나 행정 처리를 요청할 때 ODA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당근’이자 명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한국이 주요 공여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으면, 향후 유사 상황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현지 관료들에게 예전만큼 힘 있게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국내 정치권의 비리 의혹과 정쟁 때문에, 교민 보호와 직결될 수 있는 ‘외교적 자산’까지 함께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다.
日·美는 ‘국익·전략’ 챙기는데… 한국만 ‘순진한 원조’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ODA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비리 의혹을 덮기 위한 ‘지원 중단’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변 강대국들은 ODA를 철저한 국익 추구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은 인프라 개발을 자국 기업 진출과 연계해 경제적 실리를 챙기고, 미국(USAID)과 중국(일대일로)은 원조를 통해 해당 국가에 대한 정치·외교적 지배력을 강화한다.
반면 한국은 ‘순수 원조’라는 명분 아래 예산 규모만 늘렸을 뿐, 이를 국내 산업 전략이나 외교적 지렛대(Leverage)로 활용하는 치밀함이 부족했다. 전략의 부재는 감시의 사각지대를 만들었고, 그 빈틈을 비선 실세나 특정 종교의 청탁 창구로 악용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0월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과 만나 온라인 사기 범죄 등 양국간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대통령실]
“감정적 단절 아닌 전략적 재설계 필요”
정부는 “치안·보건 등 투명성이 담보된 사업 위주로 구조를 재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를 넘어선 ‘전략적 재설계’를 주문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제개발 NGO 전문가는 “캄보디아는 동남아 외교의 요충지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 한국이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며 “특혜성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되, 치안 시스템 현대화 지원처럼 국민 보호와 직결되거나 한국 기업에 이익이 되는 사업은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스마트 ODA’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예산을 꼼꼼히 검토하면서도, 보건·의료·교육 등 사회적 취약층을 위한 ODA 사업은 반드시 지속되어야 하며, 이러한 접근이야말로 국가 간 신뢰를 공고히 하고 더 큰 협력을 이끌어내는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번 예산 삭감이 감정적인 국내 여론에 눈치만 살피며 단순한 ‘정치적 꼬리 자르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때나마 정치 권력의 사유화 도구로 전락했던 ODA를, 국가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고 국익을 지키는 전략 자산으로 정상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