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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23 대한고려인협회, ‘고려인 강제이주’ 기억하는 ‘유네스코 로드’ 추진 - - 정영순 회장, “강제이주에서 정착과 성취까지, 고려인 전체 역사가 유네스코로 가는 것” - - 협회 2년 만에 회원 500명대로…“문화센터 아닌 권익조직, 권리·공동체·인식 전환에 집중”
  • 박병두 기자
  • 기사등록 2026-04-06 08: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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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가운데 정영순 회장


지난해 9월15일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적잖은 관심과 함께 궁금증도 남았다. 선언은 컸지만 이 사업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고,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또 왜 이 사업이 중요한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마침 최근 정부의 국내 동포사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내 정착 동포를 둘러싼 정책이 조금씩 확장되는 흐름 속에서, 출범 2년째를 맞은 대한고려인협회는 어떤 방향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있을까?

이 같은 궁금증을 안고 대한고려인협회 정영순 회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26일 협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로 고려인 독립운동사를 조명하는 포럼 현장에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협회의 역점 사업으로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꼽았다. 그는 이 사업을 단순한 과거사 복원이 아니라, 고려인 디아스포라 전체를 국제적 기록으로 정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는 세계적인 디아스포라 기록유산”

정 회장에 따르면 이번 사업의 출발은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록유산센터(ICDH)가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 관련 기록유산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려인 강제이주사의 가치를 발견하고 제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기자는 사업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안한 국제기록유산센터 반영수 책임전문관과 통화를 통해 통해 사업의 배경과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반 책임전문관은 “실크로드 쪽 사업은 국제기록유산센터가 주도해 우즈베키스탄 기관과 공동으로 추진했던 별도 프로젝트였고, 그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에 또 어떤 기록유산이 있을까’를 찾다가 고려인 디아스포라 기록에 착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려인 기록은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나아가 우크라이나까지 걸쳐 있어 국제공동 기록유산으로 추진할 수 있겠다고 봤다”고 말했다. 유네스코는 단독 등재보다 국제공동 추진 방식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추진 주체는 대한고려인협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그리고 각국 고려인 공동체다. 정 회장은 현재 광주월곡고려인문화관, 키르기스스탄 고려인협회, 타지키스탄 고려인협회,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알마티 고려인 국립센터, 전러시아 고려인협회 등과의 협력망이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각국의 문서보관소와 박물관, 지역 공동체가 소장한 기록을 모으는 과정에서 정 회장이 현장 네트워크 역할을 맡고 있다.

정 회장은 이번 사업의 핵심이 ‘강제이주’라는 사건 하나만을 부각하는 데 있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건 단순히 강제이주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고려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역사,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정착하고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이야기까지 함께 들어가야 합니다. 강제이주는 출발점이고, 그 이후 정착과 발전까지 포함된 전체가 고려인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 자체가 유네스코로 가는 겁니다.”

반 책임전문관 역시 “강제이주만 부각하면 고려인 입장에서는 피해 서사, 러시아 입장에서는 가해 서사로만 읽힐 위험이 있다”며 “정책 기록, 행정 기록, 정착 이후의 경제·예술·문화 활동, 개인의 일기와 서신 등을 폭넓게 모아 고려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됐는지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 사업은 ‘강제로 쫓겨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자신들을 고려인이라 부르며 정체성을 지켜온 사람들의 기록을 함께 담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이번 등재 추진의 의미는 더 커진다. 반 책임전문관은 “디아스포라는 여러 민족이 겪은 역사지만,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17만 명이 넘는 대규모 강제이주와 빠른 현지 적응, 그리고 지금까지도 ‘고려인’이라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며 “이를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정 회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고려인 역사를 세계사적 사례로 바라본다. 그는 “고려인은 두 번, 세 번 이동한 민족이다. 이 역사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과 유라시아 여러 나라가 함께 협력하는 일에 이 사업이 기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에 따르면 올해 현지 조사, 내년 강제이주 90주년을 계기로 등재하는 추진계획이 잡혀있으며 국제기록유산센터는 전문가 연구와 국제 과제 설계를 맡고, 고려인 등재 추진체 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보훈부 예산을 받고 있어 프로젝트가 현실화되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정영순 회장이 대한고려인협회 정기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고려인협회는 "권익조직" 분명히 해야...

정영순 회장 자신도 여러 층위의 이동과 정체성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사할린 출신 3세 고려인으로, 부모는 사할린 1세다. 부모가 이르쿠츠크에서 유학하던 시절 태어나 사할린에서 성장했고, 이후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과 해외 생활을 거쳐 사할린 출신 시부모님의 영주귀국을 따라 2017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의 공적 활동은 교육에서 시작됐다. 러시아어권 중도입국 아동과 청소년들이 한국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 적응을 못 하는 이유는 언어입니다. 언어는 도구잖아요. 도구가 없으면 지식을 못 얻어요. 학교를 다녀도 결국 대학에 못 가고, 사회적으로도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본 문제는 곧 권리 문제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교육만 생각했는데, 따라다니다 보니까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기본적으로 권리 차원에서 문제가 심각했어요. 결국 모든 문제들이 원인을 따져보면 권리에 걸려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그는 고려인협회의 교육위원장 역할을 맡았고, 점차 고려인 전체 문제로 시야를 넓혔다. 정 회장은 자신이 협회장에 도전한 이유를 “교육은 아동의 권리지만, 사회 정착과 장애 동포,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까지 보다 보니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할린 3세가 고려인협회장을 맡는 데 대한 일부의 부정적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1·2세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3세부터는 큰 차이가 없고, 한국에서 사는 고려인의 문제는 결국 같다”고 봤다. 그런 인식이 협회 운영의 출발점이 됐다.

현재 대한고려인협회는 정회장의 취임 이후 2년 만에 조직의 성격을 분명히 바꿔놓고 있다. 회원 수는 200여 명에서 500명 이상으로 늘었고, 회비를 내고 봉사에 참여하는 문화도 자리잡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출신국에서는 소수민족 단체라 해봐야 문화센터밖에 없었다. 한국어 가르치고, 한복 입어보고, 행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문화센터가 아니라 권익조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협회의 중점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권리 회복이다. “동포로서 인정받고 국적이 있어야 한국이 ‘집’이 됩니다. 그래서 동포권리와 국적 회복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부의 성장이다. “3D 업종에서 조금 더 나은 사회적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교육과 자격증, 기관 협력을 통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사회적 인식 개선이다. “고려인을 지원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대등한 파트너로 봐야 합니다.”

고려인은 “불쌍한 사람”아냐, “같은사람”

이 가운데 정 회장이 가장 자주 꺼낸 말은 “같은 사람이다”였다. 그는 “고려인은 ‘불쌍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그건 맞지 않다. 우리는 문제도 있고 좋은 점도 있는 하나의 공동체”라며 “같은 사람이다, 같은 사람이다, 같은 사람이다. 저는 그 말을 늘 반복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도 흥미롭다. 처음부터 교육사업을 하겠다고 인생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협회장이 되겠다는 정치적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고려인의 존재와 가치를 넓게 펼쳐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됐고, 그 흐름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이다. “특별한 욕심은 없습니다. 제가 일을 즐겁게 하면, 거기에 따라 자연히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회장의 말대로 지금은 고려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시기일 수 있다. 정부의 관심이 국내 정착 동포사회로 넓어지고, 고려인 공동체 스스로도 문화행사 중심에서 권리와 제도 개선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논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고려인의 강제이주를 피해 서사에만 묶어두지 않고, 유라시아를 횡단한 정착과 성취, 정체성의 역사까지 국제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고려인 강제이주’ 서사가 정말 ‘유네스코 로드’로 이어질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과정이 한국 사회가 고려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한 단계 바꿔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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